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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자유야? 개고생이야?" 집 떠난 39세의 오열기

by 김태라


2025년 11월 24일, 지난 6년 간 내 삶의 켜켜이 쌓인 시간들을 품었던 집을 떠나는 날이다. 큰 가전과 가구를 포함해 차 생활에 필요치 않은 물건들은 이미 당근 거래로 모두 처분했고, 계절 옷처럼 당장 필요 없지만 언젠가 쓸 물건들은 미리 지인들 집에 보관해 두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챙겨야 하는 것들은 업무용 컴퓨터처럼 매일 써야 했던 물건들 몇 가지였기 때문에 내 차로 충분히 감당이 가능할 것 같다 판단했고, 그래서 용달은 따로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차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올해 초부터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 삶에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처분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이삿날 일주일 전까지도 하나도 처분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은 필요 없어도 언젠간 필요할 것 같았다. 푼돈 몇 푼에 당근으로 처분하기에는 모든 물건들을 애틋하게 애정했고, 결국 짐 줄이기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삿날 일주일 전에서야 뒤늦게 현실을 자각하고 갑자기 폭풍 당근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물건들은 생각보다 바로바로 거래가 되어서 빨리 처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삿날까지 집에 남은 물건들은 1. 너무 애정해서 비싼 가격에 당근에 올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했거나, 2. 너무너무 애정한 나머지 차마 당근에 올리지 못한 물건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지극한 애정 때문에 그 물건들은 버려졌다.


아침 7시부터 짐정리를 시작하면 늦은 점심즈음 마무리가 되어서, 집주인에게 돌려받은 보증금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을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하늘이 깜깜해진지 오래였지만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내가 가진 짐들은 도저히 내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차에 구겨 넣고도 남은 짐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 대문 밖에 방치했다.

덕분에 동네 어르신들이 버리려고 내놓은 줄 알고 가져가는 해프닝도 생겼다. 주방용품을 담아둔 박스를 가져가셨던 어르신이 박스 안에 있던 렌틸콩의 요리법을 물으러 오셨다가 어르신들이 박스를 가져가셨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어차피 짐들이 감당이 안 되던 찰나였기에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이미 가져가신 건 그냥 쓰시라고 드렸다.

체력도 고갈되고 차에 담지도 버리지고 못하는 짐들에 대해 깊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건 다 그냥 버리기 시작했다.

아끼던 전신거울, 층간소음을 잡아주는 요가매트, 운동기구들을 그냥 모두 쓰레기 처분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손에서 놓지 못했던 물건들이 종량제봉투 옆에 초라하게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씁쓸함을 넘어선 묘한 감정이 일었다.

내 삶의 일부라고 여겼던 물건들. 이들을 모두 팔고 나서 보니 현금으로 1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허망하게도, 그것들은 너무나 쉽게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나눔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줬으면 좋았을 텐데, 부질없는 욕심에 너무 오래 끌어안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서 산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공표한 후, 내 안전을 걱정하는 원가족들과는 다툼으로 사이가 소원해졌다. 차에서 산다는 선언은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살기 위한 선택이었기에 가족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이사 관련해서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가족 대신 지인들을 괴롭히게 되었다.

차에 들어갈 만큼만 짐을 줄인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계획이었다는 걸 깨달은 후 여러 지인의 집에 짐을 맡겨두었다. 이사 일주일 전에는 뭘 어떻게 정리할지 전혀 감이 안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고 일주일 동안 매일 다른 친구들이 집에 찾아와 짐 정리를 도와주었다.

주체적인 삶을 꿈꿨것만, 그 시작은 주변에 크나큰 부채감을 쌓는 일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버린 터라, 이삿날 당일에는 도저히 염치없어 누구에게도 선뜻 전화를 걸 수 없었다. 자정이 다 되도록 홀로 짐과 씨름했고, 밤은 깊어가는데 끝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밤 11시, 눈물을 머금고 마지막 희망처럼 이모에게 SOS를 보냈다. 그리고 정말 고맙게도 이모와 친척 오빠가 화성시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주셨다. 이모 차에 짐을 한 짐 싣고, 모든 짐을 뺀 뒤 비로소 문밖을 나섰을 때, 이미 시계는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사를 끝내고 나니 온몸이 아렸다. 사실 일주일 내내 정리를 해왔기에 몸이 굉장히 피곤해진 상태였다. 하필 이삿날 갑자기 기온도 갑자기 떨어졌다. 이런 추위에 대비하지 못하고 모든 두꺼운 옷들은 친구네 집에 맡겨둔 상태였다. 친구가 하필 출장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는 상태여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집에서 나오자마자 몸살감기에 제대로 걸렸다. 그리고 며칠을 차 안에서 정말 많이 울었다.



몸도 아프고 막상 나오기는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미래를 걱정하자면 해결이 안 되는 문제들이 너무 많았기에 오늘 내가 감당 가능한 일들만 처리하며 지내왔다. 그리고 오늘의 목표는 집에서 짐 빼기였다. 막상 집에서 나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짐들이 차 안에 가득 차 있어서 잘 공간도 없었다. 내 나름대로 '차에서 살면서 꼭 필요하다'라고 생각한 물건들이어서 차에 실었는데, 그 짐들이 결국 내가 몸을 뉘일 자리마저 집어삼켰다. 사무실 소파에서 불편하게나마 잠을 잤지만 춥고 건조해서 몸살이 더 심해졌다. 결국 다시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이모네 집에서 약을 먹고 며칠 요양을 했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따뜻한 집 내부의 공기, 버튼만 누르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 정수기, 푹신하고 포근한 이불, 먹을 것으로 가득한 주방. 집에서 나온 지 사일째 되는 날, 나는 절실히 느꼈다. 뭐니 뭐니 해도 집이 최고다.


나는 왜 차에서 살고자 마음을 먹었을까? 올 한 해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했다. '마음의 병이 너무 심해서 지금 약간 미쳐있는 상태인가?' '사실 나는 엄청난 관종이어서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해서 관심을 받고 싶은 걸까?' 많은 순간 삶을 재고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미래였다. 이 여정의 끝에 어떤 대답을 얻든 일단 해보는 게 맞다는 결론이었다.

집에서 나온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나는 다시 내 결정을 의심한다. 차에서 사는 것이 과연 자유를 의미할까? 그냥 개고생이 아닐까? 나는 그저 지독하게 나 자신을 괴롭히고 싶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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