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짐짐짐.
줄인다고 열심히 버려고 계속 늘어나는 지겨운 짐들. 차에서 산지 한달이 되었지만 마치 불사신처럼 나의 공간을 야금야금 점령하는 녀석들과의 전투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차에서 모든 의식주는 가능했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하나가 있다. 바로 영화편집이다. 많은 전기와 공간을 필요로하는 영화 편집을 위해서는 당장 작업할 공간이 절실했다. 급한 대로 아는 지인 분의 사무실 한켠을 한 달 동안 빌려 쓰기로 했다. 슬쩍 재연장이 가능할지 떠봤을 때 대표님은 난방도 안 되는 낡은 건물의 추위를 걱정했다. 추운 것은 싫었지만 또 다시 이사를 할 생각을 하니 더 싫어서 나 혼자 추운 사무실에서 쓸 방한 용품을 모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30일, 여느 때처럼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띠링!' 하고 울렸다.
"오늘이 말씀하셨던 계약의 마지막 날입니다. 제가 다음 달부터는 사무실에서 레슨을 해야 해서요. 사용이 어려우실 것 같네요."
.갑작스러운 문자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계약 만료 당일에 갑자기 갈곳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나 혼자만 당연히 재계약 가능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나온 지 한 달 만에야 비로소 내 짐들이 조금 정리된 것 같았고, 낯선 차박 생활에도 간신히 적응해 가던 참이었는데... 이 지겨운 짐 정리를 또 다시 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온몸의 힘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 상황을 사무실 대표님을 아는 다른 지인에게 토로했다. 그리고 그분께 전해 들은 이야기가 내 어깨를 더 무겁게 했다.
"사무실에 짐 쌓인거 보고 당황했다더라고..."
내 공간인데 어때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내 책상 주위에는 나의 '삶의 흔적'들로 가득 차, 마치 이사센터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남들에게 나의 감당 안 되는 너저분한 인생이 낱낱이 노출되고 있던 것이다.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내가 정말 엄청난 민폐 덩어리였구나...' 생각하니 더 힘이 빠졌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 민폐를 끼치기 위해 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차 개조가 정말 절실했다. 차를 빨리 개조해서 시트도 드러내고 수납함도 만들면, 드디어 제대로 된 수납함이 생겨 진짜 나만의 생활공간이 생길 것이다. 나는 차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던 1년 전 겨울부터 전국 팔도의 차 개조 업체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김해의 한 업체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김해까지 가는 것은 무리이기는 했지만 가격도 타업체들에 비해 저렴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특히 사로잡았던 것은 네이버에 스토어를 운영해서 온라인 무이자 할부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차에 무시동 히터도 달고, 인산철 배터리도 달고, 모기장, 암막커튼, 슬라이드 전자레인지 등등... 꿈을 꿀 수 있는만큼 최대한 꾸었다. 여러 카드의 한도를 싹싹 긁어모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8월부터 카드 연체가 시작되더니, 내 모든 카드들이 줄줄이 비상사태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연체일이 늘어나자 카드 한도 '0원'은 물론, 계좌들마저 동결이 되어 체크카드, 교통기능도 사용을 못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최소 200만원부터 시작하는 차 개조는 더 이상 계획이 아니었다. 그냥 아득한 꿈이었다. 그럼에도 예약을 취소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못 한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건 무조건 실현시켜야만 했다. 더 이상 남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도 없고, 짐을 더 줄일 수도 없고, 다른 집을 구할 수도 없다. 아, 물론 돈도 없다.
나 혼자 머리 싸매고 짱구를 굴려봤자 답이 안 나올 것 같아, 일단 무작정 김해로 향했다. 일단 가서 생각해보자. 김해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도 나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들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협찬을 해주시면 제가 몸 바쳐 홍보할게요!' 라든가, '현금 할부... 아니, 그냥 주실 순 없나요...?'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었다.
김해에 도착하니 가슴이 턱 막히는 듯 답답함이 밀려왔다. 업체 2분 거리 앞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30분 넘게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장님, 차 개조를 하러 왔는데요, 차 개조 비용이 없어요.'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 인생에 잠시 사라졌던 염치가 갑자기 몰려왔다.
간신히 용기를 짜내 꾸역꾸역 업체로 향했다. 대표님의 얼굴을 보고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하며 고장난 웃음을 지었다. 심장이 더 쪼그라들게 대표님은 정말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정말 친절하게도 내가 다른 공업사 앞에 주차를 잘못해서 직접 옮겨주시겠다고도 하셨다. 차 키를 전달하며 갑자기 아차 싶었다. 뒷편에는 내가 차에서 살면서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한 무작정 다 챙겨와서 차가 거의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어떠한 운도 떼기 전에 그 짐을 보고 기겁을 하실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셨다.
"차 엔진 소리가 너무 이상한데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카테고리였다. 대표님은 보닛을 열고 엔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곤 아주 심각한 얼굴로 아는 공업사에 전화를 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차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엔진이 인간에게는 심장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너무 당황해서 놀라지도 못하고 넋이 나갔다.
"차 개조하는 것도 문제지만, 차 엔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엔진은 일단 작은 거라도 수리가 들어가면 사실상 차 한 대 값이 나오니까... 어쩌면 개조를 안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냥 실 없는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저에게서 이 차 마저 가져가시려는 건가요? 대표님의 지인 공업사에서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엔진 소리가 너무 이상해요."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봤지만, 쉐보레 부품을 취급하는 곳도 많지 않아서 자신들은 못 맡을 것 같다는 대답뿐. "기아나 현대도 엔진 수리가 2~300만 원은 드는데, 쉐보레는 수입차라서 분명 그것보다 몇 백이 훨씬 더 들 겁니다..."
이 차가 집인 걸 차치하고라도, 중고로 구입한 지 1년도 안 된 차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망 선고'를 받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