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단편소설
전시회 마지막 날도 첫날과 다르지 않았다. 전시회장 입구가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첫날처럼 인파에 압도되는 놀라움이나 긴장감은 사라졌다. 사장은 어제 저녁 먹은 후 곧바로 호텔로 가지 않고 술을 더 마셨는지 혹은 호텔 방에서 혼자 술을 마셨는지 아침부터 술이 덜 깬 듯 붉게 부은 얼굴로 전시회장에 왔다. 그는 부스 앞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참가회사들은 어떨지 몰라도 주최 측은 상당한 수익을 올렸을 거라고 말했다. 회사로 돌아가면 곧바로 자금 문제를 해결할 일이 실감 났을까. 민서도 그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돈과 연관된 이곳저곳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실무자이기 때문이다. 부은 얼굴로 비타민 음료를 단숨에 들이켠 사장은 민서에게도 한 병을 내밀었다.
“오늘이면 전시회도 끝이네요.”
“그러게요. 다녀간 사람도 많았고, 받아 놓은 명함도 많으니 돌아가서 열심히 영업해야죠. 일본회사는 첫 계약이 어렵지, 한번 성사되면 안정적으로 믿고 거래가 된다던데···.” 민서는 자신이 하는 말을 믿고 싶었다.
사장과 민서는 점심을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전시회장에 마련되어 있는 휴게 공간에서 각자 도시락을 먹으며 교대로 부스를 지켰다. 빈틈없이 고된 일정은 마지막 날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동안 다녀간 사람은 적지 않았다. 샘플을 요청한 바이어와 한국 출장 때 회사로 한번 찾아오겠다는 회사 대표도 있었다. 하지만 계약을 예측할 수 있는 좀 더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 막힌 자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채무자들을 설득할 수 있고 직원에게 밀린 월급에 대한 계획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회 폐장 시간이 다가오자, 아침부터 붉게 부어올랐던 얼굴이 가라앉은 사장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나흘간의 고된 업무를 마친 통역이 인사했다. 그가 부스에서 멀어졌을 때, 사장에게 말했다.
“하루토 상이 안 왔어요.”
“아, 그 힘내라 노인이요.”
“어제 물어볼 게 있다고 했잖아요.”
“김 팀장님, 그분이 친절하긴 하지만 그뿐일 거예요. 며칠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그분 회사요. 한국에 판매사도 있고 꽤 실속 있어 보였어요.”
벽에 부착된 패널을 떼어 내기 위해 의자를 벽 앞으로 옮기며 사장이 말했다.
“은퇴한 노인은 아니었군요. 한국에 돌아가서 메일 보내 보시죠.”
사장은 부스를 철거하며 민서를 힐끗 보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 민서가 말했다.
“전화해 볼까요? 어차피 내일 오후 비행기니까. 아직 시간이 좀 있잖아요.”
“제가 전시회는 좀 다녀 봤잖아요. 별 도움 안 될 거예요.”
폐장을 알리는 음악과 안내 방송에 사장의 말소리가 잠겼다.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접이식 사다리를 가지고 전시장 안으로 하나, 둘 들어왔다. 그들은 짐을 뺀 부스부터 철거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하루토 상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는 늘 폐장 시간에 다녀갔었다.
걸음이 빨라진 사람들 속에, 검은 슈트를 입는 사람들 사이에 베레모를 쓴 노인이 서 있다. 사람들은 옆으로 흩어지고 밀려나면서 하루토가 점차 또렷해진다. 고개를 숙이고 파란 종이를 손에 들고 있다. 지도를 보는 사람처럼. 길 잃은 노인처럼.
민서는 머리를 흔들고, 사장이 떼어 낸 패널을 포장하고 사용했던 접착테이프 등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의자 위에 올라서서 현수막을 떼어 내던 사장의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의자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전화를 받으며 회사의 주소지를 확인해 주는 모습을 민서가 올려다보았다. 사장은 손가락으로 전화기를 가리키며 ‘주관사 박 대리’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전화를 끊고 현수막을 마저 떼어 낸 사장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김 팀장님, 아직도 힘내라 노인을 기다리세요? 전시회 주관사 박 대리가 내년 전시회 참가 신청을 벌써 하라고 하네요···.”
부스를 철거하는 드릴 소리에 민서는 뭐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드릴 소리가 멈추었을 때 민서는 노인 명함에 적힌 회사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
“이 회사 들어 본 적 있으세요?”
“아, 알죠. 서울 사무소도 있을 거예요. 하루토 상 회사예요?”
“이 회사의 자회사로 되어 있어요.”
“제가 전시회 경험만 많았지, 이젠 감도 떨어지나 봐요. 그러고 보니 이번 전시회 호응이 좋았던 게 김 팀장님 열의 때문인 거 같아요.” 사장은 민서를 추켜세우면서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이 전화해 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김 팀장님이 하시면 어떨까요? 김 팀장님이 계속 컨택하셨으니···.”
전시회장을 빠져 나기가 전에 전화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신호음이 울리다 음성 메시지로 넘어갔다. 민서는 용건을 남겼다. 오늘 전시회가 끝났어요.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오지 않으셔서요. 등등의 이야기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뿐, 자신을 밝힌 후에 궁금했던 것이 있으면 연락 달라는 간단한 음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