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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인 Jun 10. 2016

[시 익는 마을] 그녀의 속눈썹은 길었다

<속눈썹의 효능> 이은규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지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 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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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굉장히 사소한 계기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화자는 연인과 꽃놀이 갔다가 눈에 꽃가루가 들어갔고, 연인이 입김을 불어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단추가 후두둑 떨어졌고, 속눈썹도 떨어졌나봅니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속눈썹을 봤습니다. 책은 헤어진 연인의 것인지, 그 당시의 속눈썹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럴 것만 같다고 추측됩니다.


속눈썹을 보고 당시 상황이 떠올랐지만, 당신은 없습니다. 혼자 꽃놀이를 갔지만 다래끼를 얻어왔습니다. 꽃가루가 눈에 들어갔을 때 입김을 불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봄날이 가듯, 어느 순간 자연스레 연인과 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입김 없어도 봄날은 돌아옵니다. 화자는 초승달 같은 속눈썹이 꽃달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무심히도 떠난 봄날이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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