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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인 Jun 10. 2016

[시 익는 마을] 아내가 슬프면 온 세상이 슬프다

<아내의 마술> 심보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 버리자

미망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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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에서 점층법이 사용됩니다. 시인은 단계별로 슬픔을 심화시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내는 슬프네요. 사랑하는 사람이 슬프면 나도 슬픕니다.

그런데 아내는 장모님께 전화 받으며 슬픔을 내색 안합니다. 

아내는 '우린 잘 지내지'라고 말하지만, 그 속의 진짜 아내야말로 가장 슬픈 존재가 되지요.

나는 결국 슬픔이 없는 이상향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을 원하게 되죠. 모자 속 토끼가 모자 속으로 들어가듯, 내가 거울로 들어가고 싶지만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버리면 안되는 사람이, 버리면 안되는 상황에서, 버리면 안되는 것들을 버립니다. 마술 속 완벽한 세상이 아니기에 우린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는 울면서 식탁 모서리를 쓰다듬습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나는 아내를 달랠 길이 없습니다. 

아내 스스로도 어찌할 줄 모르는 손은 그래도 무언가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그 손동작마저도 처연하고 슬프게 다가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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