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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인 Jun 07. 2016

[시 익는 마을] 똑같지만 정반대…그래서 아프다

<제3통증> 이혜미

없는 네가 가장 아름답다

일생에 단 한번 붉은빛 새순을 틔우고 비틀비틀 떠나는

자여, 어디에서 비척이며 연명하던 행려병자이기에 부끄러

움을 모르고 알몸으로 섰는가 가시 박힌 수레바퀴를 굴리며

네가 다가온다 오늘 세계는 물그릇처럼 아프다 밤의 태양

은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워 울고 있다 홀로의 좌표들을 풀어놓고 너의 입술

을 만지는 일은 세로로 여닫힌 괄호를 더듬는 일 같았다 네

생에 조금 관여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얼음을 꽉 지면 슬픔

에서 뜨뜻미지근한 물이 흘러나온다 너는 천천히 젖어간다

왜 돌아가는가, 물어볼 적마다 꿈의 언저리에서 자꾸만 두

발이 굳어갔다 수은이 흐르는 강을 건너며, 오늘의 등(燈)

을 켜들지 말자 벼랑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너의 눈가에 별

들이 가득 고였으니 한 밤을 버리고 굳어버린 매듭을 얻어

불행의 화관을 쓰게 될지라도


휘발하는 것만이 우리의 경전이다

네가 선물해준 거울은 아름다웠으나

아무리 닦아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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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또다른 내 모습입니다.

일생에 단 한번 붉은빛 새순을 틔우기도 하지만 때론 어디에서 비척이며 연명하는 행려병자이기도 하지요. 부끄러움을 알지도 못하고 알몸으로 서있기도 하고요. 이 알몸이야말로 나는 모르지만 진짜의 내모습입니다.

진실된 내모습이 다가오면 오히려 아프고 두렵습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술마시고 필름끊긴 다음 내 행동들을 주변사람에게 들을때의 공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이야말로 또다른 내 모습이기에 현실에서의 내 삶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괄호를 더듬는 일처럼 관여해보고 싶지만 무의식 속에는 수많은 트라우마가 내재돼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에서 뜨뜻미지근한 물이 흘러나오고 슬픔에 천천히 젖어가는 거겠죠. 

불행의 화관을 쓰게 될지라도 다가가고 싶지만, 휘발하는 것만이 우리의 경전이라고 합니다. 꿈 깨면 말짱 꽝. 기억조차 나지 않게 됩니다. 

무의식은 거울을 선물해줬습니다.

거울은 내 모습을 보여주지만 반대로 적용되죠. 오른손을 내밀면 상대는 왼손을 내밉니다. 악수가 안됩니다. 

무의식은 나에게 거울을 선물하며, 자신에게 향하는 길을 가르쳐 준 셈이지만...똑같지만 정반대이기 때문에 결코 무의식 속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닦아도 (무의식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인상 깊은 구절 - 네가 선물해준 거울은 아름다웠으나 아무리 닦아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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