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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TAE Jan 07. 2021

너무 심각하게만 살지 말자구요.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by 무라카미 하루키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었다. 여러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막히면서 책이 더 읽히지 않았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의 주제가 무거워서일까, 혹은 생각하고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서일까. 가벼운 에세이가 읽고 싶어 이 책을 읽게 됐다.


2.

에세이가 맛깔스럽고 매력 있다. 이름도 상큼한 여성잡지 ‘앙앙’에 연재된 것도, 재미난 판화 삽화를 곁들인 것도 매력적이다. 그리고 글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생각은 소탈하고 관조적이다. 관조적이라는 의미가 세상에 대한 깊은 묵상과 고민을 통해 어느 순간 세상의 이치에 초월한 철학자적인 관조가 아니라, 그냥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가깝다. 좋은 것은 좋게, 어쩔 수 없는 것은 빨리 잊어버리고, 힘들면 낮잠 자고 나서 잊어버리려는 것처럼. 혹은 아무려면, 이라는 느낌이다. 가끔은 과하지 않고 적당하게, 자신과 상황을 소재삼아 가벼운 웃음을 주기도 한다. 휴일 오후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나서 따뜻한 이불속에서 한 장 한 장 읽고 싶은, 맘이 편해지는 에세이다.


3.

읽다 보면 지혜를 주는 문장들도 종종 나온다. 다만 이 잠언은 삶을 일깨워주기 위한 훈계의 경구가 아니라, 작가가 살아가면서 얻은 일상을 대하는 자세를 넌지시 툭 던지는 느낌에 가깝다.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공감하게 되는 부담 없는 생각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요컨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행은 예정에 없던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즐겁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당초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여행하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글귀는, 업무나 개인적인 여러 가지 일들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이것도 일종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계획에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기 쉽게 해 준다.


혹은 이런 것이다. '인생에는 분명 그렇게 평소와는 다른 근육을 열심히 사용해볼 시기가 필요하다. 설령 당시는 노력의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작가가 자신의 사회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젊은 시절 재즈바를 열어 열심히 손님과 얘기도 하고 사회성 있게 살았던 순간을 회상하는 한 대목의 문장이다. 내 평소의 성향과는 다른 근육, 다른 분야의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할 순간도 있는 것이다. 본사에서는 매일 쓰는 보고서가 지겨웠었는데 현장에 있으니 보고서를 쓰는 훈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 꽤 유용하다. 지금은 음악 근육을 열심히 사용하고 있다.  없지만, 나중에는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4.

섹스에 대한 얘기도 재미나게 활용한다. 섹스를 자극적인 소재로 활용하거나 로맨스로 포장하지 않고, 일상을 즐기고 글에 적절한 유머를 돋기 위한 소재로 사용하는 것이 재밌다. 철인 삼종경기를 얘기하는 한 대목을 보자.


'이 경기의 큰 즐거움 중에 하나는 바다가 따뜻해서 수영할 때 고무 잠수복을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맨몸으로 바다에 휙 뛰어들어 헤엄쳐 돌아와서는 그대로 자전거에 올라타면 된다. 이러한 점이 정말로 좋다. 고무 잠수복을 입고 벗기란 실제로 해보면 상당히 귀찮다. 섹스로 말하자면…… 아니, 이건 그만두자.'


상상하게 되지만, 과하지 않고 즐겁다.


5.

어느 해 연말, 평가와 성과급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마음이 상했던 순간이 있었다. 본사에 와서 사업관리 담당으로서 치열하게 일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해외현장의 저조한 성과와 발생한 많은 현안들 때문에 결국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그때 만난 이 에세이의 한 대목이 큰 위로와 힘을 주었다.


'그런데 분명 개미든 매미든 자신이 개미라는 것, 매미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을 테지. 그저 개미로 살고 개미로 죽어갈 뿐. 거기에는 물론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없다.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따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인생도 있겠구나, 하고 이따금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 오게 된 것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고 그 가운데서 만나는 상황인 것이지. 그런 인생의 순간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다른 시선으로 이 순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쿨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6.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는 글 자체에 대한 목적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세상에 대한 철학이나 메시지 혹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과 비전을 추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야기 자체의 힘이 있다. 그 이면에는 부조리에 대한 고민이나 사회적 목적의식 등에 사로잡히지 않는 개인적인 성향과 소탈한 성품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이번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작가의 소설과 성향이 일면 이해가 됐다.


무엇보다 맛깔난 글이 즐거웠다. 매일 일상을 치열하게만 살아갈 수는 없지 않나. 작가의 편안한 문체와,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지, 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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