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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TAE Feb 08. 2021

기억력이 나쁜 덕에 브런치를 시작하다.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 이야기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 중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이야기가 있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어느 마을에 푸네스라는 기억의 천재가 있었다. 그는 말한 것, 들은 것을 모두 기억했다. 예전 어느 날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으며 그때 바람이 어떻게 불었고 새가 울었는지를 기억했다. 책을 읽으면 어느 챕터에 어떤 글자가 쓰여있는지 모두 기억했다. 심심한 날이면 과거 어느 하루 통째의 기억을 되살려 재생했다. 하루 해가 뜨고 질 때까지의 새가 울고 바람이 불며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등 모든 기억을 시간 순으로 되살려 보는 것이다.


나는 유난히 기억력에는 자신이 없었다. 푸네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와 같은 기억력이 있다면 삶이 얼마나 편하고 쉬웠을까 생각했다. 전날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려면 한참 고민해야 했고, 특정 순간에 어떤 일을 했으며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는 건 참 어렵기만 했다. 공부도 암기과목은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뭔가를 외우는 것은 정말 귀찮고 괴로운 일이었다. 물론 노력하면 외워지기도 했지만 그 기억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서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메모를 많이 했고, 회의나 수업, 강의를 들으면 잊어버릴까 봐 기록하는 것에 집착했다. 하루 일을 기억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면 나중에 그 날을 되짚을 수 있는 단서가 생겼다. 디지털 매체에 쓰기 시작하면서는 한 두 장의 사진을 붙여서 그날 하루를 기억할 힌트를 만들었다. 그렇게 일기를,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글을 쓰는 동기의 밑바탕에는 부족한 기억력으로 나중에 내가 살아온 인생마저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책을 읽고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여줄 목적이 아닌 그저 내가 나중에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인상 깊거나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밑줄을 치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밑줄 친 부분만 따로 모아서 발췌를 했다. 발췌를 하고 나면 내가 이 책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 부분이 인상 깊었는지, 주제와 내용이 어느 정도 요약되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버무려 글을 썼다. 그렇게 요약하고 정리하고 나면, 나중에 이 글만 보면 다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으니 유용했다.


기억이 좋지 않은 것의 장점도 있다.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데,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도 재미가 있다. 결말을 상세하게 다 기억하면 다시 읽어도 밋밋하겠지만 결말이 잘 생각나지 않는 상태이니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 마냥 재미를 느낀다. 마지막에 가면 대략 결말이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말을 새롭게 다시 발견하는 재미도 괜찮다.


암기하고 되살리는 기억에는 자신이 없지만 의외로 기억력이 좋은 영역은 따로 있었다. 귀로 들은 기억, 특히 음악적인 기억력은 제법 구체적이고 오래 남았다. 어떤 노래를 듣거나 멜로디를 들으면, 연주를 위해 공부하거나 카피했던 음악은 꽤나 오래 기억했다. 일하면서 도움이 되는 기억력은 아니지만, 메마르지 않고 풍성하게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인 것 같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가 살아가는 인생은 추상적인 사고가 결여된 삶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어떤 특성을 가진 개별적 대상을 추상적 개념을 가진 범주로 묶거나 구분 짓기 어려웠다. 고양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모두 같은 고양이가 아니다. 각각 개별의 수많은 특징이 있는, 털 달리고 수염 있고 꼬리가 긴 동물을 기억하는 것이지, 한 집단 혹은 종으로서 ‘고양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었다.


내 인생에 좋은 기억력은 없지만, 그 덕분에 기록하며 글을 쓰는 습관을 만들 수 있었다. 브런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내 기억력 덕분이다. 약점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강점이 생기는 것이 인생의 신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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