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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TAE Feb 15. 2021

움베르토 에코의 유머와 지성이 그립다.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을 읽다.

고등학생 시절,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너무 어려웠는데 어느 순간 미친 듯이 몰입해서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재작년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장미의 이름 리커버판이 나왔는데, 커버가 너무 아름다워서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오랜만에 에코의 책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천 페이지가 가까이 되는 책을 들고 다니며 읽었다. 예전엔 미처 다 이해하지 못했던 중세의 시대적 배경이나 신학적 내용들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다시 읽어도 역시 재미있더라.


움베르토 에코는 내게 이상적인 지성인의 화신 같은 존재였다. 기호학자에 소설가, 3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지식인. 어릴 적 만난 그의 지성의 폭과 깊이는 경이로운 인상으로 남았다. 그를 수식하는 서술어만도 매우 길고 화려하다. 잠시 책날개의 글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소개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기호학자이자 미학자, 그리고 세계적 인기를 누린 소설. 1932년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토리노 대학교에서 중세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학위 논문을 발전시켜 1956년 첫 번째 저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 문제’를 펴냈다. 이후 이탈리아는 물론 미국, 브라진, 아르헨티나 등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1971년에는 볼로냐 대학교 부교수로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기호학 이론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정교수로 승진해 2007년까지 볼로냐 대학교에 재직했으며 국제기호학회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1980년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출간했고, 이 작품은 곧바로 <백과사전적 지식과 풍부한 상상력의 결합>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전 세계에서 3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이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프라하의 묘지>, <제0호> 등 역사와 허구,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상상력이 교묘하게 엮인 소설들을 발표했다. (후략) -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표지 中  


움베르토 에코는 여러 소설과 에세이, 많은 학술적인 책들 썼다. 워낙 지식의 스펙트럼이 넓어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저술하고 집필했다. 그중 내가 정말 사랑했던 책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에세이집이었다. 에코 특유의 유머와 해학, 그리고 날카로운 지성과 숨길 수 없는 지적 명석함이 짧은 에세이에 자연스럽게 버무려 담겨있었다. 이탈리아의 정세와 당시의 사회 상황을 모르는 나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글 자체의 재미가 있는 좋은 에세이였다. 어쩌면 내게 에세이의 좋은 모범, 원형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에코의 글일지도 모르겠다.


움베르토 에코는 2016년 암으로 별세했다. 그의 타계가 슬프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다시는 그의 지성과 위트 넘치는 글을 읽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 런, 데,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 모음집이 새로 발간되었다. 에코의 타계 이후 그동안 발행한 칼럼 중 2000년 이후 발행된 글들을 모아 별세한 직후 발행된 책이라고 한다. 이제야 번역된 것이 아쉽지만 다시 그의 글을 볼 수 있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중 일부를 원문과 함께 생각을 담아 공유한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특징은 분노를 동반한 항의 운동이다. 그런데 이 운동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은지는 알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이런 저항 그룹들을 더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격을 가하지만,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들 자신조차 모른다.   - <유동사회> 中


이 글은 유동 사회에 대한 설명하는 글에서 나온 문단이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의 과도기를 포스트모던이라고 볼 때, 근대사회의 서사와 질서, 공동체는 나름의 기준이 분명했던 것에 반해 지금 시대는 개인주의로 인해 동질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의 기준점이 부재한 사회가 되었다. 이를 유동 사회(Liquid society)라고 표현한다. 에코는 이 과도기가 상당히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이 사회의 특징을 분노를 동반한 항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짧은 문단이지만 매우 감명 깊었던 것은, 최근에 보는 많은 운동과 항의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비단 얼마 전 미국에서 발생했던 게임스탑과 로빈후드, 공매도 반대의 일련의 흐름도 지향점보다는 항의와 반대가 주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읽힌다. 분명한 반대는 있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성격은 이 사회의 해답을 찾기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어리석은 일은 이런 경우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의미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성취나 희생, 또는 그 밖의 좋은 특성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텔레비전에 나온 다음 날 누군가 카페에서 우리를 보고는 <야, 어제 너 텔레비전에 나온 거 봤어!> 하고 말한다면 그건 단순히 네 얼굴을 알아봤다는 것이지, 너를 알아준다는 뜻은 아니다. - <신은 안다, 내가 바보라는 걸> 中


이건 정말 내게 해주는 이야기 같다. 앨범을 발표한 이후 멜론이나 애플뮤직, 스포티파이에 노래가 발행되어 조금은 으쓱해져 있는 내게,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것은 단순히 네 얼굴이나 노래를 알아봤다는 의미 외에 다름 아니라는 것. 뜨끔하지만 적절한 때에 만난 적확한 문장이다. 너무 들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과 수사학에서 은유를 최초로 규정한 것도 그의 큰 업적이다. 그는 은유가 단순한 장식이 아닌 인식의 형식임을 확정 지었다. 이는 결코 사소한 발견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후 수백 년 동안 은유는 말해진 것의 본질을 전혀 바꾸지 않으면서 그저 말을 아름답게 하는 수단으로만 여겨졌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중략) 그는 다른 은유와 마찬가지로 이 은유에서도 겉으로 도저히 연결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물에서 최소한 하나의 공통점을 찾고, 그런 다음 서로 다른 두 사물을 동일한 종의 아종으로 바라볼 것을 권한다.  -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견> 中


은유라는 것은 건설과 홈레코딩으로 글을 엮는 내게 매우 의미 있는 방법인 것 같다. 본질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두 가지 분명한 성격의 주제에서 공통점을 찾고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은유인 것 같다. 건설과 홈레코딩, 두 주제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은유법을 좀 더 공부하고 이해해보고 싶어 졌다. (단지 에코가 이야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브런치를 쓰면서 더욱 느끼는 것은, 에코의 글의 날카로운 시선과 적절한 유머, 그리고 적당한 분량이 얼마나 브런치의 글에도 잘 어울릴 수 있는 가이다. 글쓰기에 참고할 만한 좋은 텍스트들인 것 같다. 읽는 것 못지않게 쓰기 위해 참고할 만한 원형으로도 손색없는 좋은 글들이다.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쓰는 분들에게도 꼭 읽어보시길 추천하고 싶다.(앞 광고, 뒷 광고 전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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