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익히는 '기예로서의 글쓰기'를 배워봅시다.
산문작가를 꿈꾸는 분들께 내가 제안하는 목표는 ‘한 주제로 200자 원고지 600매 쓰기’다. 200자 원고지 600매는 얇은 단행본 한 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분량이다.
저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를 종합적으로 살피게 되며, 자기가 던지려는 메시지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비판 할 지를 예상하고, 그에 대한 재반박을 준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처음의 주장이나 자기 자신 역시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런 성장과 변화를 의미한다.
기예를 익히는 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초반에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고 자빠지는 일을 거듭해야 한다. 기예의 두 번째 특징은 남이 하는 설명으로는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고 몸으로 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 깨침과 숙달 사이에 시간이 걸린다는 게 기예의 세 번째 특징이다.
에세이 원고를 검토할 때 어떤 점을 주로 살피는 지를 물었다. 위는 서로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는 팀장급 편집자 네 명이 들려준 답이다. 언뜻 제각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밑바닥에는 큰 공통점이 하나 있다. ‘독자의 시선’이다. 편집자들은 ‘이 원고를 요약해서 소개문을 썼을 때 독자가 그 내용을 흥미롭게 여기고 전문을 읽어보고 싶어 할까?’를 따진다.
에세이를 잘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질이 뭘까. 나는 ‘삶을 사랑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 대상을 유심히 헤아리게 된다. 그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진다. 좋은 에세이에는 그렇게 삶에 대한 남다른 관찰과 애정이 담긴다.
창작의 욕망을 억지로 누르면 어떻게 될까. 나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공허감이 바로 그 결과라고 생각한다. 요즘 한국 사회는 어느 연령대, 어느 세대를 봐도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하는 살마이 많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객관적이 조건이 나쁘지 않은데도 공허함을 토로하는 젊은이도 있고, 중년에 이르러 허무함을 못 견디겠다며 뒤늦게 일탈하는 이도 있다. 그런 정체성 위기는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이 만들어내는 일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할 때 온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지금 내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 당신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작품을 몇 편 발표하기 전에는 당신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욕망을 마주하고 풀어내면 분명히 통쾌할 거다. 가끔은 고생스럽기도 하겠지만 그 고생에는 의미가 있다.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자. 의미를, 실존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심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다.
나는 그런 품격과 정갈함보다는 워드프로세서의 자유와 속도감이 더 좋다. 글이 막히면 오래 고민하지 않고 아무 문장이나 적어본 뒤 지우고 다시 다른 문장을 시도하면서 언덕을 넘는다. 문단 배치를 바꿔가며 이야기의 호흡과 효과를 전과 비교하고 개선한다. 플롯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고, 시인이라기보다는 건축가와 같은 관점으로 글을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