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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Jan 18. 2017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

집밥을 파는 식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들어 스스로 요리하다 보니 돈 주고 사 먹는 음식에 더 민감해진 것도 있다. 애초에 집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으므로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집밥이 먹고 싶어'라는 마음도 없을뿐더러 이미 어머니의 손맛에 30년간 길들여진 탓에 어떤 유명한 집밥집에 가더라도 '아... 계란말이에는 당근이 들어가면 안 되는데' '제육볶음에 양파가 너무 적은데' 같은 아쉬움만 품고 나오게 된달까.


설령 '집밥' 식당에서 김밥천국 같은 분식집과 동일한 메뉴를 먹는다 하더라도 밥집 음식에 조금 더 까다로운 기준을 두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역시 '집밥'을 파는 곳이니까 기준이 더 까탈스러워진다고 해야 하나. '아닌데? 우리 집 집밥은 이거보다 더 정성스러운데? 두부가 더 많이 들어가는데??' 따위의 유치한 우월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배고프다..


집밥 집에 대한 적의감이 절정에 달하게 된 대에는 가락시장 근처의 자그마한 집밥집 하나가 크게 작용했다. 몇 년 전 추운 겨울 친구와 영화를 보기 2시간 전에 부랴부랴 한 끼 때울 장소를 찾고 있었다. 때마침 근처의 집밥집을 발견했고 나는 어쩐지 스멀스멀 몰려오는 불안감에 주저했지만, 촉박한 시간과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던 집이야. 맛없었다면 진작에 망했겠지"라는 친구의 말에 묘하게 설득당해서 칼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신선하게 맛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먹는 내내 친구와 실성한 듯 하하호호 웃으면서 먹었다. 결국, 반쯤 남기고 나오면서 친구에게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등등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영화도 늦었다.


그리고 몇 년 후, 30살이 되고 똑같은 찬바람이 부는 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곳을 방문하게 됐다. 완곡히 거부했지만, 친구들은 또다시 "오래된 집이야. 맛없는 집이 안 망할 리가 없어"라는 개 같은 논리를 펼치며 끌고 갔다. 그리고 그렇게 시킨 제육볶음 3인분은 역시나 한결같이 맛없었다.

제육에 박혀있는 갓 볶아 펌이 찰랑거리는 아주머니의 머릿결이라던가, 쥐똥만 한 양이라던가, 너무 늦은 공깃밥을 건네며 "요즘 친구들은 스마트폰이 있어서 밥이 늦게 나와도 별말이 없네 호호홓" 따위의 소리는 둘째 치더라도 또다시 속은 나 자신의 바보스러움, 친구가 쓱 보여주는 맛집 리스트에 소개된 이 집의 이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때까지만해도 약간은 즐거웠다


세상엔 수십억의 사람이 있고 수십억의 생각들이 있다지만 가끔은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맛집으로 소개된 가락시장의 집밥이나, 그 사람의 마음, 혹은 내 인생 같은 것들 말이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하나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걸까? 그 과정이 인생의 재미인 걸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5년 후에도 그 밥집이 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때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달라져있었으면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17.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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