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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Apr 24. 2017

소소한 일기(4월)

1. 인생은 알 수가 없어



어렸을 때 우주선 레고를 고릴라로 만들어버린 적이 있다. 그 고릴라는 빈약한 날개도 달려 있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쩐지 그로테스크하기도 했다. 고릴라가 되어버린 우주선 레고에게 심심한 사과의 마음을 건네 본다.

 

 레고는 얼마나 어안이 벙벙했을까? 그는 분명 멋진 우주선이 될 수 있었는데.. 이런 주인ㅅ..놈을 만나 뜬금없이 고릴라가 되어버릴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겠지.

 고릴라의 원한 때문일까? 여태까지의 나 또한, 줄곧 고릴라가 되어버린 우주선의 마음으로 지내오고 있다. 생뚱맞은 고릴라가 되어버렸다는 당혹감과 이왕 이렇게 되어버린 거 앞으로는 무엇으로 변해갈지 약간은 기대되는 그 틈 사이에서.

 고릴라 다음에 과연 무엇이 되어있을까? 당나귀? 양배추? 통조림?

 일단 나란 레고를 조립 중인 존재를 진정시키는 것부터가 우선이겠지.





2. 감성 터지는 남자가 되고 싶다


 

 새벽 3시 34분쯤 나는 문득 감성 터지는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돌라보스키 체르마뇽 바반디로스' 따위의 필명을 가지고 있거나, 어색한 친구에게 대뜸 '라일락의 꽃말은 젊은 날의 추억이야'라는 문자를 보내본다거나(카톡은 안된다)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불타오르는 노을이 아름다워서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리는.. 그런 미친ㄴ.. 아니 감성 터지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






3. 내가 과일이라면



 나는 '자두'일 것이다. 자두 자두 끝없이 졸리니까....ㅎ





4. 아무 말 대잔치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더더욱.


 "오늘 날씨가 좋아 보여서 창문을 열었는데, 추워서 다시 닫았어."


 "사리곰탕면을 먹으려고 물을 붓고 기다리는데, 김치를 꺼낼지 오이소박이를 꺼낼지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먹었어." 따위의 아무 말 대잔치를.


귀찮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5. 글로벌 얼th



 예전에 다니던 과의 특성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 '글로벌'이라는 단어였지만, 막상 크게 와 닿는 느낌은 없었는데.

 한 달 전 홍대 근처의  일본인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라멘집에서 8명가량의 떠들썩한 중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잘 먹겠습니다"를 조용하게 속삭인 지극히 제3세계스러웠던 그 공간에서, 나는 '글로벌'이란 단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체험 학습의 힘이란...


 만약 "잘 먹겠습니다."를 몽골어로 말했다면(Сайхан хооллоорой) 동북아시아 대화합의 장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6. 일상은 욕심꾸러기



 일상은 마치 고요한 늪처럼 모든 감정 스르르 집어삼킨. 아픔도 기쁨도 영원히 느낄 수 없는 것이 참 얄궂은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간절히 바라던 커다란 쁨이거나, 혹은 물에 젖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축축하고 절망적인 슬픔의 극단적인 양극일지라도. 그저 결국은 시간에 휩쓸리고 무뎌지다가 '상기'해야 할 과거의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상을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7. 나는 언제나 다이어트를 꿈꾼다



 다이어트를 다짐할 때면, 냉장고에는 음식들이 그득그득 쌓이고 동생은 내 방으로 달려와 야식을 꺼내먹는다. 이런 지구 따위 얼른 터져버렸으면..






8. 오늘만 끝까지 살아야지



 웬만한 각오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삶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어느 만화에서 말했듯이 '오늘만 쉬고 내일부터..'라는 어쭙잖은 마음가짐으로는 택도 없다. '오늘만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각오로 매일을 살아가야 될까말까다.

 병원에 있을 때도 아침마다 '오늘만 끝까지 살자'라고 매일 다짐하며 버텼는데. 병원을 벗어나고서도 처절한 다짐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니... 억울하다.

 우주 통일이 목표도 아닌데. 나는 그저 소소하게 즐거운 직업으로 적당히 돈을 벌고, 주말에 여가생활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며 조용히 늙어가고 싶을 뿐이다.

 




9. 죽는다면...



 서서히 죽어갈 수 있다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면서 조용히 죽어가고 싶다.

 갑자기 죽는다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즐거웠어" 였으면 하고. 그래서 항상 누군가와 헤어질 때는 즐거웠다고 말하곤 한다. 설령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하더라도.






10. 오늘도 참 즐거운 하루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책을 읽는 건 정말 좋아했지만, 글쓰기는 영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특히 일기 쓰기는 더더욱 고역이었다. 잔뜩 녹슬어버린 금속활자 기계처럼 힘겹게 그리고 똑같은 글들을 매일 반복해서 찍어댔다.


1. 오늘은 ~을 했다.

2. 구체적으로 한 일을 나열.

3. 오늘도 참~ 즐거운 하루였다.


 무슨 일을 했던 간에 일기의 끝은 언제나 '오늘도 참 즐거운 하루였다.'로 끝났다. 덕분에 어릴 적 일기장 속의 추억은 언제나 매일같이 즐거운 일들뿐이다.

 





11. 가벼워지는 인간관계



 4년 정도 사용한 핸드폰이 열악한 환경과 혹독한 근무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했다. 덕분에 잠깐 동안 핸드폰을 쓸 수 없었는데, 내가 폰번호를 외우고 있어서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6명도 미처 안됐다.

 어렸을 때는 옆집이건 아랫집이건 어디든 문만 두드리면 동 전체와 대화가 가능했는데. 핸드폰은 진보하는데 어쩐지 내 인간관계는 점점 가벼워진다.





12. 사람은 변하지 않지만, 사랑이 변한다


 늦은 저녁,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뽀뽀쪽을 하는 커플을 급작스레 발견했다.

 남자는 넋이 빠져있고 부끄러운 그녀의 볼에는 사랑으로 물든 장미가 피어나고...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그런 분위기에 치명적으로 당한 나는 화창한 캘리포니아의 해변가에 느닷없이 던져진 드라큘라처럼 캬아아앜카카아아앜 소리를 (마음속으로) 내며 스르르 빠져나가 대로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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