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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Apr 19. 2017

내가 싫어질 때

 여권을 만들러 갔다. 서류를 작성하는 곳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신혼부부가 있었고,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녀가 사진 모서리를 좀 더 가위질하니 마니로 가볍게 투닥거리고도 있었다.

 

 내가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앉은 원형 테이블에는 이미 노부부 한 쌍이 계셨다. 할아버지는 눈이 안 좋으셨고, 할머니는 손이 아프신 듯했다.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오래된 시소처럼 할머니께서 작성지를 읽으시면 그다음 할아버지께서 볼펜으로 작성하는 과정을 주고받으셨다.


 그 모습은 '사랑'이라는 레고 상자를 조립하는 모습과 같아 보였다.

 어쩌면, 무결한 존재가 아닌 완성해 나가는 모든 과정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사랑의 시작은 이렇게나 불완전하냐고 슬퍼했던 나는 정말로 어리석었다고 느꼈다.

 아직도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지만, 두 분이 만들어가는 그 모습은 아름다웠고 부러웠다. 요즘 따라 눈물이 많아진 나는 살짝 울컥해서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했다.


 뭐, 적어도 할머님께서 "늙은이 글씨 더럽게 못쓰네! 진짜..."라고 타박 줄 때까지는 그랬다. 

 그러자 발끈하신 할아버지는 "그럼 ㅆ8... 당신이 쓰던가!" 라며 볼펜을 원탁에 탁~! 하며 내려놓으셨고 그렇게 오 분 동안 투닥투닥...


 두 분의 급격한 태세 변환에 당황해서 멍하니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할머니가 느낀 듯했다. "아이고.. 너무 시끄럽죠? 미안해요."라고 말씀하신 할머니에게 얼른 눈웃음으로 꾸벅 인사한 뒤, 나는 다시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노부부 또한 다시 서로를 도와가며 작성지를 채워 나갔다.



 다른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엿듣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두 분의 대화는 바로 옆의 내가 못 듣기에 데시벨이 너무 컸다.

 

 "몇 년짜리 신청할까?" 할머니가 물으셨다.


 할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셨다. "당연히 십 년짜리로 만들어야지."


"뭘 그렇게나.. 앞으로 얼마나 산다고..." 


 할머니의 말끝은 흐려졌고 원탁은 순간 조용해졌다.


 고백하자면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나 또한 '아이고... 얼마나 사시려고...'라는 생각을 했다. 이 마음은 의도적으로 튀어나온 악한 생각이 아니었다. 콧볼로 튀어나온 대형 여드름 같이 나도 모르게 불쑥 솟아오른 욱신거리는 마음이었다. 기독교에서 '원죄' 혹은 불교의 '업보' 또는 순자 '성악설'의 근거로 설명되는 그런 마음이겠지.


 이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례한 생각들이 불쑥 떠오를 때면 그날은 언제나 끝없는 자괴감에 빠져버리곤 한다.

 사회적으로나 겉으로 보이는 가식적인 말과 행동들이, 문득 떠오르는 이런 식의 재수 없고 추잡한 본심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 나인지.. 그 괴리감이 주는 거리감을 느낄 때마다 나는 항상 부끄럽다.

 도덕적으로 위대한 성인군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마음과 생각이 꿈꿔왔던 인간상은 결코 아니었는데.

 언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지, 미세먼지처럼 눈과 목을 가렵게 하는 마음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불안해하며 또다시 반성해본다.


 

 "할머니. 성인은 단기 아니면 십 년짜리만 만들 수 있어요." 순간, 건너편의 공무원분이 불쑥 말했다.


 "그려? 그럼 어쩔 수 없이 십 년짜리로 만들어야겠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어쩐지 기쁜 듯했다.


 나는 두 분이 바란다면, 십 년 24장의 여권을 가득 채울 때까지 건강히 사시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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