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혈액암 환자의 인생 적응기
3차 치료를 마치고 더 이상은 병원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암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치료를 받고 싶은 마음이 콩알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나는 깔끔하게 미쳐있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정신이 나가버린 바람에 치료를 그만두는 일이 왜 합당하지 않은지 나 스스로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나 또렷한 눈빛으로 치료를 중단하겠다고 말하는 통에 의사고 친구고 “그래도 완벽하게 치료를 마무리 지어야 되지 않겠니?”와 같은 정상적인 의견을 말할 엄두를 못 냈다.
정신병자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반박하려는 시도는 헛되다. 오히려 조커의 정신과 의사였던 할리퀸처럼 비정상적인 오로라에 동조되고 세뇌되어 버린다.
그 당시의 가족과 친구 모두가 나에게 최면이 걸려버렸다.
가슴 안에 심어져 있던 혈관 주사기도 제거했다. 매트릭스 1에서 네오의 배꼽에 박혀있는 위치추적기를 뽑아내는 것같이 호쾌하게 뽑아버렸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의왕시에서 머물렀던 집은 백운호수와 바라산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집 앞에는 갈대밭이 있었는데 해질 녘이면 황금빛과 오렌지색, 진한 초록색이 뒤섞이면서 하늘과 지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아름다운 호수 주변은 온통 음식점들뿐이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전국의 외제차가 이곳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돈 많고 시간 많은 아주머니들이 온갖 비싸 보이는 것들로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삼삼오오 떼 지어 몰려다니며 호수 주변을 뒤덮었다. 모양새가 철을 따라 이동하는 청둥오리 같았다.
중년의 남녀도 간혹 보였는데 열의 아홉은 불륜커플이었다. “저 나이의 부부 치고는 너무 불타오르는데?” 싶은 생각이 들면 대부분이 부적절한 관계였다.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설명해 보려 해도 너무 끈적거린다. 뒤엉켜있다. 보통의 중년부부는 그러지 않으니까.
이런 부분만 빼면 호수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생각을 그만둔 사람의 하루는 단순하다. 저절로 눈이 떠지는 늦은 점심에 일어나, 집 앞의 산길을 가볍게 산책하면서 마을의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들을 뒤적거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하루의 대부분을 주변의 동내를 산책하면서 지냈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이 보이는 것이 좋다.
철판지붕으로 된 집들은 하나 같이 오래되어서 녹이 슬어 금이 가있고 그 자리에는 넝쿨이 뒤덮여있었다. 장작을 때워서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도 있었다.
마치 그 공간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멈추어 있었다.
마을을 산책하는데 어느 날부터 어린 황구 한 마리가 항상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꼬리가 짧고 귀가 축 처진 것이 영락없는 잡종이다. 잡종은 어릴 때는 하염없이 귀여운데 커서 어떤 모습이 될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신나서 쫓아 달려오다가도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면 정색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친해지고 싶어서 소시지 하나를 들고 갔는데 나 따위에게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는지 그 후로는 영영 본 적이 없다.
이곳은 모든 것이 밝은 갈색과 황금색으로 뒤덮여있다.
눈이 부시다.
갈대도 노을도 나를 뒤쫓아 오는 강아지도 같은 색으로 서로가 뒤섞여 있다. 어느 샌가는 매일 밟는 산길의 흙들조차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색으로 뒤엉켜 빛나고 있는데 나 혼자만 뚝 떨어진 섬 같은 회색빛이다.
그곳에서는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영하가 자주 놀러와 주었다. 곧 군대를 가니까 할 일이 없어서 온다고는 하지만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아프고 난 후로 친구는 날 항상 배려해준다. 영하는 대체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나 같은 성격의 친구를 만나 고생하는 걸까. 날 등 뒤에서 찌르기라도 한 걸까?
친구의 방문은 단조로운 이곳에선 일탈같이 신나는 일이다. 마치 500원을 들고 동내 슈퍼로 달려가던 어릴 적 나처럼 잔뜩 들떠버려서는 보여줄 것도 없는데 이것저것 떠벌리며 소개하여 주었다.
집 앞의 대추나무에서 대추도 따서 주었다. 달려있는 열매가 버거워 보일 정도로 묘목이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주인아저씨가 화초처럼 정성스레 돌보는 나무였다.
말리지 않은 대추는 달콤한 사과 맛이 난다. 친구는 몰랐다고 한다.
괜스레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