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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Sep 12. 2017

살고 싶은 집

읽지 않은 메시지가 100통이 넘어가 대면한 사람에게서  어색한 결혼 초대 전화를 미처 피하지 못한 날, 여기저기 치이고 힘겹게 돌아가는 길은 온통 회색뿐이어서 마음마저 콘크리트처럼 푸석해지는 느낌이 들 때면, 나는 종종 미래에 살고 싶은 집을 상상하곤 한다. 로또가 허락한다면, 시로부터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의 사람이 많지 않은 약간 후미진 곳에 개인주택을 짓고 싶다.

넓을 필요는 없지만 2층만큼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저녁에 멍하니 계단에 앉아있는 고독한 어른' 이 되는 것도 멋있을 것 같다. 천장은 높았으면 니까 1층의 천장을 개방형으로 뚫어서 2층의 지붕이 보이게 할 예정이다. 침실과 부엌은 최대한 단순하게 디자인하고 싶다. 침실은 검은 이불과 스탠드, 부엌은 기억자 형태의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을 메인으로 할 것이다. 침실은 좁게 부엌은 넓은 의미로 단조로웠으면 한다.

마음과 몸의 휴식공간인 서재와 욕조에는 특히 많은 신경을 쏟고 싶다. 둘 다 "넓은 편이야?"라고 물어본다면 대답하기 머뭇거리게 되는 크기였으면 좋겠다. 서재는 삼면이 책장이고 한쪽은 산이 보이는 큰 창이 달려있었으면 한다. 책상 외에도 벽 한쪽을 요(凹) 형태로  판 뒤 책상을 두어, 마치 독서실처럼 글을 쓰거나 집중이 필요할 때 사용하고 싶다.


더 작았으면...


화장실의 샤워부스는 단순하고, 욕조는 컸으면 좋겠다. 바닥에 배수구를 설치하기는 하겠지만, 물이 고이지 않게 조심할 생각이다. 바닥에 물기가 가득해서 습하고 곰팡이가 끼는 것은 질색이다. 건조하고 통풍이 잘되는 욕실이 좋다.


그 외의 남는 방들은 딱히 상관하지 않지만, 여유가 된다면 침대와 책상 하나를 두어 손님방으로 만들고 싶다. 예전에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 질 일이 있었는데 시집을 간 친구 누님의 방을 손님방처럼 쓰고서 '와... 방에서 혼자 머무르니까 대접받는 느낌이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손님도 집에 마련된 손님방에서 그런 마음을 느껴준다면, 1년에 많아야 한 두 번 사용되는 용도일지라도 괜찮을 것이다.

돈이 들더라도 욕실과 테라스의 바닥은 미끄럼 방지 줄이 파인 상아색 대리석으로 나머지 집안은 나무로 깔고 싶다. 테라스에는 작은 파라솔과 나무 식탁 하나를 두고, 이어지는 잔디밭은 최대한 넓었으면 좋겠다. 잔디를 정리하고 진동하는 풀향기를 맡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풀향기는 베어진 풀 시체에서 풍기는 피 냄새 같은 거 아니니?"라는 농담을 떠올리면서 피식거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작은 나무 한그루도 심을 생각이다.



더 넓었으면...


개인주택은 유지보수에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분명히 투덜거리며 귀찮아하겠지만, 꼼꼼히 정성껏 배울 생각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생겨버린 문제를 꾸역꾸역 해결한 뒤, 뿌듯해하겠지. 자신에게 주는 트로피처럼 공구 재료를 구입할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에게 전화해서 별 일 아닌 듯 무용담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런 성격이다.


이따금 친구나 가족들이 놀러 오면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기분 좋을 만큼의 술을 마신 뒤, 시골 이웃의 텃세나 직장에서의 고충, 건강을 생각할 나이와 몸에 좋은 것들 같은 주제들에 관하여 열띤 토론을 늘어놓을 것이다. 사람들을 집에 보내거나 손님방에 재운 뒤 집안을 정리하고 약간은 주저하다 맥주 한 캔을 따고 테라스로 나가면, 입양한 대형 유기견이 잠에서 깨어 따라 나와 내 옆에 눕는다. 날씨가 기분 좋게 선선해서 바람이 사박사박 분다. 밤하늘을 보며 내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별자리들을 찾아 헤매다가, 다음 날 도시로 나가 별자리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전쟁이라도 나면 저녁에 별자리를 보고 동서남북을 파악해야지..'라고 생각하다가 피식 웃고서 강아지와 함께 스르르 잠들어버린다.



그러다 아차 하고 눈을 뜨면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다. 꿈꾸던 행복은 저 멀리 달아나 있다.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의 꿈은 얼마나 큰 걸까? 내가 바라는 행복은 돈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작은데. 작지만 나에겐 넘칠 만큼 아름다운데. 행복한 상상 속에서 잠시 쉬고 난 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막 같은 현실을 걸어가며 행복을 좇아간다. 모래밭을 밟으면 사박사박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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