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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May 14. 2016

첫사랑

 



'꽃 따위를 바라보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학교의 진달래 동산을 오르면서 생각했다. 말이 좋아 '진달래 동산'이지 실상은 가파른 언덕에 갓난아기 손톱처럼 자그마한 진달래 몇 그루만 피어있는 잔디밭 일 뿐이다. 학생들이 곳곳에서 소주병과 짜장면 그릇들을 펼쳐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얼굴이 벌게져서는 휘청거리는 사람도 있다. 나와 같은 신입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대자로 뻗어서 누워있고 선배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은 그 모습이 우습다는 듯 킥킥거린다.


'으아... 이제 고작 오후 1시인데도... 어마어마하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술병들과 널브러진 신입생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언덕을 오르다 보면 마치 전쟁터에서 아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적군의 고지를 향해 행군하는 군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4월 말의 햇살은 따갑게 내리쬐고 손에 든 딸기 셰이크는 점점 녹아내린다. 대학생활은 딱 예상한 만큼 지루했고 3월 한두 번의 개강파티를 참여한 후 대학생활에 대한 나의 얕은 로망은 충분히 채워졌다.


사진제공 : 김희영


 나는 그다지 흥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어서, 현재의 친구들 만으로도 벅찰 만큼 충분히 '사회생활'을 원하는 본능의 잔잔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으니까.

 

 들고 있는 경제학원론 책에서도 중요한 건 본문의 내용일 뿐, 내용의 출처인 각주가 아니다. 대학은 나에게 각주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다. 그저 봄에 벚꽃을 스치는 미풍처럼 조용히, 소리 없이 다니다 졸업하면 그뿐이다.


"꾸웨이어에웨엑"


 어느 정도 언덕이 가라앉은 곳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는데 잔디밭 옆 밴치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의 신입생이 토를 게워냈다. 자신의 주량을 모르면서 객기를 부리는 신입생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래도 오후 1시인데..!"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고개를 홱 돌렸는데 저 너머의 벚꽃나무 아래에 서 있는 너를 보았다. 너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한 굵은 웨이브의 머리에 세일러 칼라의 루즈한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키니 진을 입고서 동기 여자애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마치 들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확실히 사랑에 빠지기에 적합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수업은 늦어버렸고 옆 잔디밭 신입생은 토를 게워낸다. 그 지독한 냄새는 더운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고 주변의 선배들은 쌍욕을 하면서 웅성거리고 있는 틈 사이로 너를 보았으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난 너를 보면서 멍하니 서있었다.

 

 사실 그때 너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말할 때,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냐고 대답을 보채는 친구들의 재촉이 부끄러워서 "그냥.. 같은 과 동기니까 얘기하면서 알아가다 보니까.." 라며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널 본 그 순간부터 내 세상은 너로 가득 차올랐다.

 너무나 식상해서 이제는 B급 영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든 그 상황과 마음이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고 오글거려서 저녁 이불에 얼굴을 묻고 킥킥거리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콜록대며 너를 앓는 일이 잦아졌다. 너무 콜록대는 통에 너를 뺀 주변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너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확실히 내가 생각해오던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키도 작고 다리도 짧아서 종종걸음으로 매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흡사 펭귄 같귀엽다고 생각했다. 강의실에서 턱을 괴고 앉아있는 너의 볼마치 고양이 발바닥 같이 토실토실해 보여서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힘들었다.

 분명히 나의 이상형은 서유럽 스페인 지역 부근에서 장기 어학연수를 온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신비한 눈동자의 서양미녀였는데. 그때는 정말 콩깍지가 단단하게 씌웠던 것 같다.


 

 

 정말 정말 싫어하던 과의 술자리도 꼬박꼬박 나갔다. 선배들과 동기들은 아무리 불러도 항상 혼자 다니던 내가 술자리에 참석하니까 반가워하면서 어울렸지만 너를 제외한 나머지의 여집합들은 딱히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처음 너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고, 주고받은 문자를 저장해 두고, 받은 문자함의 100통이 다 차면 한통 한통 신중히 읽어보며 그나마 덜 소중한 문자를 지워보는 그런 유치한 짓도 했다.


이따금씩 너는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쪼르르 달려와서는 갑작스럽게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곤 하는 아이였다.


"태균아, 태균아!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걸 네 글자로 줄이면 뭔 줄 알아? ㅎㅎ"


"응..? 뭔데?"


"올라가 용~! 히히"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정말 재미없었다. 평소에 날 아는 친구였다면 내 앞에서 감히 꺼내지도 못했을 몹쓸 개그였다. 나는 말장난에 엄격했으니까.

 그래도 너의 농담에 난 항상 크게 웃었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어서 씨익 하고 크게 미소 지었다. 동기들은 독특한 개그코드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너는 자신의 개그를 알아주는 이가 나밖에 없다면서 내 등을 토닥거렸다.

 사실 재밌어서 웃은 건 아니었다. 널 보면 터져나오는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으니까. 단지 널 마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으니까 웃었을 뿐이다. 열심히 준비해온 주제에 부끄러워하는 네가 귀엽기도 했고.


Google image


 과에서 동해로 여행을 갔을 때, 저녁 술자리에서 만취한 너는 파란색 고무줄로 나의 머리를 묶으며 깔깔거렸고 나는 그 모습에 두근거리면서 너의 향기가 남아있는 파란색 고무줄을 마치 부적처럼 가지고 다닌 적도 있다.


 너에게선 늘 상상 속의 진주 향이 났다.

 

 달콤하면서도 탁한, 몽환적인 향.




너는 갑작스럽게 나에게 찾아왔지만, 코끝의 향기가 사라지듯이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내 마음에서 흩어져갔다.

 휴학 후 미국에 가고 귀국해서 바로 군대를 간 후 얼떨결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결정적으로, 암에 걸려서 몇 년을 고생하다 보니 너는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렸다.

 간수치가 올라서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힘들어할 때 너에게서 카톡이 왔다. 예전처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대학생 때 너를 정말 좋아했다고 말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때, 네가 정말로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걸 느꼈다.

 


 이제는 널 더 이상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너를 바라보던 그 계절이 너무나도 찬란했어서. 오늘 같이 햇살 좋은 날 선선한 바람에 벚꽃이 흩날리는 걸 볼 때, 옆 사람의 머리카락에서 달콤한 린스 향이 느껴질 때 문득문득,

 황홀했던 그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 순간순간이


그리고 그때의 설레던 내가.








예전에 싸이월드에 써 놓았던 비밀글들을 뒤적거리면서 썼습니다. 예전의 기억들은 어쩐지 부끄럽네요..ㅎㅎㅎ 이 글은 https://youtu.be/sOS9aOIXPEk  - Daft Punk - Something About Us 링크한 노래와 같이 읽으시면 당시의 제 감정이 더 잘 느껴집니다. 그때의 추억이 있는 노래거든요. 노래를 첨부하는 법은 잘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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