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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May 17. 2016

향(scent)

나는 가질 수 없었던 향기에 대한 갈망

 누구나 인생에서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로망이 하나쯤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자신이 현재 가지지 못했거나, 앞으로도 손에 넣기 어려운 것 들이 대부분이다.

 이루기 쉬운 것들에는 갈망을 가지기가 힘들다. 뭐 "나는 하루하루 소시지빵 하나 씩 사 먹는 게 인생의 목표예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물론 그런 인생이라면 하루하루가 로망을 현실로 이루는 보석 같은 삶이 되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으니까.


물론 소시지빵은 사소하다는 것은 아니고.


내가 남들보다 후각이 떨어진다는 것을 처음 느낀 건 초등학교 5학년쯤이다.  4교시 수업 중에 옆자리 친구가 소곤거렸다.


" 야 오늘 수프 나오나 봐! 수프에 밥 말아먹어야지!"


수프에 밥을 말고 김치를 얹어 먹는다는 것도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그 날 나는 남들과는 다르게 냄새를 잘 못 맡는구나..라는 걸 어렴풋이 인식했다.

 그 후 침도 맞아보고 한약도 먹고 중학교 때는 휜 코뼈를 호쾌하게 뚫어버리는 수술도 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크게 불편한 것은 없으니까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가지고 있다가 빼앗긴 것도 아니고 애초에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딱히 억울할 것도 없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는 했다.


"어! 비 오나 봐 비 냄새난다!"


창문이 없는 밀실에서 한 친구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뭐래...' 싶었는데 밖에 나가니까 정말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신기했다.


"비 냄새는 어떤 냄새야?"


내가 묻자 친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몇 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음..?  글쎄.. 약간 비릿한 듯하면서도 습기 찬?" 버벅거리던 친구가 민망해하면서 말했다.


"비 냄새가 비 냄새지 뭘...."


"홍시에서 홍시맛이 나는 거야? 지가 대장금이야 뭐야.." 하면서 친구와 킥킥거리면서 넘어갔지만,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비 냄새는 날 설레이게 한다



 어머니는 종종 걱정하셨다. 나중에 혼자 살 때, 가스 퍼지는 냄새도 못 맡아서 잘못되면 어떡하냐며 걱정된다고 하실 때마다 "참... 걱정도. 설마 죽을 정도가 될 때까지 모르겠어?" 라며 무시했지만 난 정말로 죽을 정도가 될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군대 휴가 중 자동차 안에서 비위가 약하신 아버지가 헛구역질을 할 때까지 나는 내 코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를 몰랐으니까.

 그 후 조직검사를 통해 암 진단을 받았고 이미 썩어버린 코뼈 대부분을 제거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군대의 선, 후임들은 그저 샤워는 열심히 하지만 이를 잘 닦지 않나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흠...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까 좀 우습기도 하다. 샤워는 하루 2번씩 꼬박꼬박 하지만 이를 안 닦아서 썩은 내가 나는 사람. 나는 그런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강한 항암제를 사용하는 동안 축농증도 많이 호전되었고, 후각도 많이 돌아온 적이 있다.

 돌아왔다기보다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적도 있다.


 어느 날 병실로 들어온 어머니에게서 인공 바나나 향이 났다.


"엄마 어디서 바나나 향기가 나는데? 약간 화학조미료 같은.."


 알고 보니 1층 로비에서 바나나우유를 드시고 올라오셨단다.

 어쩐지 우쭐해졌다.


 물론 그 직후, 하루 종일 굶는 나를 조금이라도 먹여보겠다며 가져온 볶음김치 냄새에 몇 시간을 토해대는 바람에 아직도 볶음김치에 대한 거부감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가끔씩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궁금했던 비 냄새도 맡아보고, 풀향기라는 것도 느껴보았다. 향수를 뿌리고 온 친구한테 "야 오늘 너한테서 좋은 냄새난다!"며 칭찬도 해줄 수 있고.

그런 날은 하루 종일 뿌듯하다.


이 날은 머리위의 나무에서 풀 향기가 났다. 살아있는 잎의 향기.



나는 '향'에 대한 로망이 있다.


어쩌면 내가 평생을 자유롭게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런 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많은 부분을 향으로 인지하고 기억하며 살아간다.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가 나는 글들이 있다.

 쓸쓸한 향기를 가진 추억들도 있다.

 비겁한 악취를 풍기는 사람도 있고, 서글픈 향기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게 무슨 냄새예요?라고 물어본다면 나 역시 그때의 친구처럼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 온데" 라며 대장금이 되어버리겠지만.



 투병 중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그루누이가 자신에게는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는다며 공허해하는 모습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진 적이 있다.

 젊은 여인의 성숙한 향기, 가장 아름다운 그 향기마저 맡을 수 있는 그루누이가 말한 '무취의 자신'은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향기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항암 치료 후 어두운 빈 방에 혼자 앉아있으면서, 병원 의자에서 차가운 커피잔을 움켜쥐면서 문득문득 느껴지던


 '무취의 나'


 타인에게서는 느껴지는 각자의 시그니처 같은 향기를 나에게서는 도무지 맡을 수 없다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그루누이도 느꼈던 걸까.




하지만 그루누이와는 다르게 나는 그런 공허함에서 끌어올려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취의 나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해 그들의 향기를, 채취를 나에게 비벼댔다. 숨을 못 쉬며 죽어가는 돌고래를 위해서 동료 돌고래들이 필사적으로 수면 위로 밀어 올려주는 것 같이.


 이제 나에게도 어느 정도 사람 냄새가 난다.

 그들의 향이 아름답게 뒤섞이면서 나만의 시그니처가 느껴지는 향기가 되었다.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이제는 나도 받은 만큼 열심히 비벼야 한다.

 내심 귀찮기도 하고, 잘 할 자신도 없지만 비비적거려야지.

 당신들이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또 한 명의 그루누이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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