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운영 중인 애플파이집에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들렀다. 여자는 애플파이와 커피세트를 시켰고 옆의 남자는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오천 원 세트에 무리함을 걱정하시다니, 지독하게 화려한 저녁만찬을 즐기고 오셨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중에 여자가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후회는 없어. 사랑하니까."
ㅇ ㅖ..?
남녀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추출되는 에스프레소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없었다. 여자분은 나를 커피 내리는 A.I 정도로 여겼던 걸까? 아니면 북극곰이 "역시 나이가 들어갈수록 콜라보다는 커피가 끌리더라... 콜라광고는 돈 때문에 하는 거지 뭐.."라고 중얼거리며 샷을 내리고 있었어도,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같은 멘트를 쳤을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젊음은 참 반짝이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의 모노드라마를 보면서 '인생의 찬란함은 참 짧고 허망하구나..' 라며 깊은 슬픔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20대 중후반에 깊은 허무주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대충 뭐 몸이 아프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지구온난화로 지구가 곧 멸망하고 어쩌고 했던 것 같다. 그런 허무주의 기조는 32살 즈음에 배달이 온 햄버거 세트에 감자튀김이 빠져있음에 극대노 하는 자아를 문득 자각하면서 '아.. 허무주의는 나와 결이 맞지 않는구나..'라고 느끼며 은근슬쩍 벗어나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그럭저럭 긍정적인 시선'과 '명랑한 듯 우울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째서 늦은 밤 술 취한 두 남녀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깊은 허무감을 느꼈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명랑한듯 우울한 마음가짐
추측해 보자면 부러움이었을까? 인생에서 한 번도 동공을 게슴츠레 풀어헤치며 "후회는 없어.. 사랑하니까.."라고 얘기해 본 적이 없음에? 그 대상이 꼭 연인이 아니라 일이나 목표에 도전하면서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후회하진 않습니다. 그 일을 사랑했으니까요."라고 말해본 적이 없음에.
어떤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지금의 투자가 노력인지 집착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오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온전히 노력하지도 않은 채 '내가 괴로우니 이것은 집착임에 분명하다. 그럼 이만 굿 바이, 아디오스'라며 회피하곤 했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너무나도 짧은 인생에서 찰나의 찬란함을 느끼기 위해 투자했어야 할 긴 노력의 순간들을 집착이라는 변명으로 흘려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후회에서 오는 슬픔과 허무함. 그래도 지금은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이미 지나친 것들에 대한 외면이 쉽지 않다.
Goodbye...Adios..
커플이 돌아간 후 밀려오는 감정들이 부담스러워 '갱년기인가?' 싶었지만, 보통 갱년기를 스스로 의심하면 갱년기가 아니라고 하니까 그냥 호르몬이 그날따라 조금 불균형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아... 모르겠다. 이제 슬슬 대방어의 계절이니까 친한 사람과 대방어에 소맥이나 기울이면서 즐겁게 웃고만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