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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Jun 07. 2016

절망은 망고 아이스티 같아

 13년 5월. 진료실의 침대누워있는 나의 눈앞에서 생착에 실패한 코 주변의 절망적인, 살아있다는 붉은색의 증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검은색 피부들이 가위로 거침없이 잘리고 있다.

 감각세포는 이식되지 않아 육체적 고통은 없지만, 눈앞에서 잘려 나가는 피 그리고 생살을 자를 때 들리는 특유의 서걱거리는 소리, 알코올 솜과 코를 뒤덮은 연고의 역한 냄새가 불편했다.


실은, 내심 아팠으면 했다.

 눈앞에서 피부가 가위질당하고 있는데도 마치 양파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주부처럼 '아까운걸..'따위 같은 생각만 드는 무덤덤한 내 마음이 싫었다.


 "빠른 시간 안에 또 다른 피부이식을 해야 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떠오른 건 왜일까.



 친구들과 술집에 가면 500cc 맥주에 빈 소주잔을 띄우고 돌아가면서 잔에 소주를 따라, 잔을 가라앉힌 사람이 벌주를 마시곤 했다.

 내 마음도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조금씩 절망과 낙담을 따라왔고, 피부이식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그 작은 한 방울이 나를 침몰시켰다. 억지로 들이킨 벌주는 독해서 한잔으로도 지나칠 만큼 어지러웠다.

 진료가 끝난 후 성형외과의 계단을 내려가고, 다음 외래를 접수한 후, 발렛된 차를 돌려받아서 집으로 가는 길에도 취한 듯 떨리는 다리와 쿵쾅거리는 가슴의 울먹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집에서 얼버무리듯 상황을 설명한 후, 도망가듯 짐을 챙겨 독서실로 향했다. 가족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아픈 사람은 피해자 아니라 되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같다고 생각했다.


 햇살이 너무 밝다.

 그리고 이마의 수술 자국은 참을 수 없이 가렵다.

 가는 길목에 있는 커피집에서 망고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보다는 달달한 음료를 마셔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고 싶었다. 차가운 아이스티를 손에 쥐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풀어지는 듯도 했다. 그런데 그때, 앞에 커플 한 쌍이 서로에 기대 걷는 것을 보았다.




 푸른 하늘, 햇살은 눈부시고 학교 옆 돌담에는 막 새싹이 돋아나는 잎들이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다. 남자는 부드러운 컬이 있는 머리에 하늘색 셔츠, 흰색 면바지에 유행을 탈 것 같은 파란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고, 긴 생머리의 여자는 분홍색 셔츠에 여자를 닮은 꽃이 수 놓여 있는 흰색 스커트, 가느다란 발목과 어울리는 빨간색 힐을 신고 있었다. 남자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팔이 여자의 가녀린 쇄골을 감싸고 있다.

 그 아름답고 빛나는 수채화에 나는 어울리지 못하는 수묵화였다.

 어쩐지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독서실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자리에서 숨을 고른 후, 아이스티 한 모금을 마신다. 너무 달아서 입안이 씁쓸하다. 고개를 숙이니 수많은 바늘들로 탄력을 잃어 너덜거리는 팔이 보였다.

 

 한 모금 더 쭉...

 

 달달한 아이스티가 서서히 스며든다. 입으로 마시는 아이스티에 붕대로 둘둘 감은 코가 시큰한 건 왜일까.


힘을 내라고 조용히 중얼거려본다. 참고 견디면 이겨낼 수 있다, 아픔은 영원하지 않다고.


"왜 이겨내야 하는데?"


내 안의 누군가가 물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알고 있으니까.

어떤 희망차고 도덕적인 말을 중얼거려도 결국 중요한 사실은 바로 내가, 지금 당장 아프다는 것뿐이다.


나는 잡지에 나오는 강인한 사람들, 위기를 극복한 위인들 같이 대단하고 의연한 사람이 아니다.

 이제 괜찮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날 다독이는 것도 지친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찾아 들으면서 "그래.. 그래도 나는 행복한 편이야." 같은 비겁한 위로를 하는 짓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무의미하고 허무하다.


 잘 버티어 오다가, 어째서 '고작'이런 일에 무너지는 걸까? 여태까지 더 큰일들도 담담한 척하며 꾸역꾸소화시켜왔는데.


 이런 느낌이 드는 날은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초점이 풀린 채로 몇 시간씩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마치 색맹테스트를 하는 것 같이.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그림 안의 숫자를 대답 하지만, 나는 아무리 인상을 쓰고 바라보아도 기묘한 빛깔의 원형뿐이.


아무리 애써도 보이지 않으니 다만 포기할 수밖에. 내 한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밖에..


애써 외면하던 내 본심과 나약함을 마주하는 날.


그런 날의 절망은, 망고 아이스티처럼 진하게,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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