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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Aug 19. 2016

양배추 샐러드 관계

  만약 회사 면접에서 "우리가 당신을 반드시 뽑아야만 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듣는다면, 약간 주저하다가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어쩐 피숍의 직원분들과는 노력 없이 쉽게 친해집니다"



 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러고서 시원하게 탈락하겠지만..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좋아해서 어지간하면 카페를 옮기지 않기 때문에, 여태껏 5~6군데 정도만의 단골 카페를 거쳐올 때마다 '혹시 나는 카페 직원을 유혹하는 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루한 친화력 속 유독 카페 직원분들과는 한 곳도 예외 없이 쉽게 친해지고는 했다.


페로몬 뿌ㅇ! 아니 발사!!

 

 물론 평소의 나는 고혹적인 매력과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으련?'같은 눈빛으로 직원분들을 대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고백하자면,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어떠한 자세로 서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삐걱거리는 모지리 쪽에 가깝달까.


 예전에 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하다 보면 일시적으로 둔감해지면서 "어? 이 단어가 왜 이렇게 낯설지?"라고 느껴지는 현상을 '의미 과포화' 현상이라 부른다고 들었는데.


 나는 '커피 주문 과포화' 현상이 걸려버렸다.


 주로 대형 브랜드 커피숍보다는 저렴하고 사람이 드문 동내 커피숍을 골라다니는 편이어서, 주문 후에는 보통 좁은 카운터를 경계삼아 서로 마주 보며 멀뚱하니 있어야 할 때가 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문득 마주 보며 기다리는 그 시간이 숨 막히게 어색해져서 갑작스럽게 팔과 몸의 관절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어야 할지, 시선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되어버리곤 했다.

겉으로는 태평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어쩌면 나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일지도..


내가 느끼는 나의 모습


하지만 그렇게 어정쩡한 모양새로 서 있으면 대부분 감사하게도, 어버버 거리고 있는 띨띨이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시고는 한다.



"오늘은 라떼에 샷 추가 안 하시네요?"



"아.. 요즘 카페인을 너무 많이 섭취한 것 같아서요"

 


"아... 그러시구나.. 저희 디카페인 커피도 있는데.."



"와... 정말요? 뭔가 본격적이네요.. 디카페인은 찾기 힘들던데"



 이런 식으로 한번 대화를 트고부터는 어쩐지 꽤나 친해지고는 해서, 어느새 자연스럽게 조잘거리며 웃고 떠들게 되는 사이가 되어버리는데,

 나는 이런 관계를 '채 썬 양배추 샐러드 관계'라 부른다.


 




 엄청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나는 채 썬 양배추 샐러드를 좋아한다. 

 고기나 생선을 먹을 때 항상 채소와 같이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서 아무래도 샤부샤부건 초밥이건 채 썬 양배추가 같이 나오는 집을 선호한다. 물론 중국집 볶음밥 옆에 끼워주는 투박하고 눅눅한 샐러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준이 있다.


 일단 드레싱은, 기본적으로는 마요네즈 드레싱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너무 향이 진해서 양배추의 맛과 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케첩만 아니라면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양배추의 상태.

 차갑고 신선한 양배추를 정교한 칼 솜씨로 실처럼 가늘게 채 썰어야 한다. 두껍게 썬 양배추는 식감이 너무 어석거려서 좋아하지 않는다. 채가 가늘수록 좋아하는데, 너무 가늘어서 양배추가 서로 엉켜 있기라도 하면 "어맛! 어마맛!" 하며 난리가 난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하지만 이런 나라고 해도 당당하게 '채 썬 양배추 샐러드를 음식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것은 딱히 아니다.

 뭐랄까.. 평소에는 딱히 신경 쓰지 않다가, 나오면 괜스레 반갑고 같이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

 

굳이 분류하자면 '소소한 좋음' 정도 되겠다.



 마찬가지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는 누군가의 삶 속에서 채 썬 양배추 샐러드 같은 관계를 맺어 가면서 살아가려 노력한다.



 드문드문 기억하며 살다가 만날 때면 정말 반가운 정도의.


 물론 소소한 애정이 소홀하다는 뜻은 아니다.

 메인디쉬가 있다면 때로는 나 같은 '소소한 좋음' 역할의 사이드 디쉬도 분명히 필요하니까. 누군가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위치가 때로 부담감으로 느껴질 때도 있 성향자체도 메인 요리보다는 채 썬 양배추 샐러드 쪽에 어울린다 생각하기도 하고.



 


 예전 암병동에는 나에게 그런 양배추 샐러드의 관계로 다가오려 했던 아저씨가 있었다.

 병실 건너편 침대에서 온몸이 검게 쩔어, 항상 불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아저씨.

나처럼 말 수가 매우 적었던 그분은 어느 날 갑자기 구름 한 점 없는 낮, 갑작스레 쏟아지는 여우비처럼 뜬금없이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요 며칠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갑작스러운 아저씨의 질문에 울화가 벌컥 치밀었다.

 '다섯 가지의 약물을 주렁주렁 연결하고 있는 사람한테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는 말은 무슨 의미야?' 

 불쾌한 마음에 "네"라고 단답형으로만 대답한 후, 커튼을 홱 하고 쳐버렸다.

 그때는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여유란 것이 없었다.

 아저씨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내가 약에 취해 해롱거릴 때 말도 없이 조용히 먼 곳으로 떠나가셨다.




 그때의 일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건, 그러지 않았어야 한다는 내 마음의 충고일지도 모른다.


 그 충고를 따라, 비록 조금은 내성적이고 약간은 어색하지만, 다가오는 양배추 샐러드 같은 관계를 받아들이고, 쌓아가고, 지켜가는 법을 배워가려 노력하는 하루하루다.





"요 며칠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어느 날 양배추 샐러드 관계의 종업원이 그때의 아저씨와 같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게요. 며칠 감기로 고생 좀 했거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눈을 우스꽝스럽게 크게 뜨며 대답했다.



"그러셨구나.. 여름 감기가 정말 무서운 것 같아요. 항상 마시던 걸로 드릴까요? 아니면?"



"아!... 네 부탁드립니다"



 사실 오늘은 기필코 딸기 바나나를 마셔볼까 싶었는데.

 어쩐지 '항상 마시던 것' 이란 말이 감사하고 부끄러워 황급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으으.. 양배추 샐러드... 나 잘 해낼 수 있을까..'카페를 나서며 손에 든 투샷 라떼를 휘휘 저으며 생각했다.









소중한 댓글에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매번 아프다고 말하기도 슬슬 민망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더위란 걸 먹어봐서 좀 많이 고생했습니다..

 더위도 먹어보고 브런치 메인에도 걸려보고.. 참 버라이어티한 인생이라 즐겁네요... 정말로요... 독자님들도 부디 몸조심하시길.

항상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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