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비록 고될지라도
새벽 5시에 하루의 문을 연다. 두해 전에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내가 그러기로 했다. 새 날의 마음가짐을 새로이하고 명상을 하며 이로운 글을 읽는다. 세상이 모두 잠든 정적 속에서 맑은 마음을 갖는 고요의 한 시간은 대체로 행복이다. 그리고 나는 임산부가 되어서도 이 4시 50분의 알람으로 하루를 시작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불속에서 무시무시하게 꾀가 나는 날도 있어 매일을 그러지는 못하지만 100일 중 90일 이상 이런 루틴을 취할 수 있다는 걸 보며 마음의 지략은 몸의 묘략보다 한 수 위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2인분의 몸이다 보니 육체의 원기가 이전과 같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두 걸음 떼면 핑 돌기도 한다. 그러면서 달라진 게 있다. 그 길로 활기찬 하루를 시작했던 전과 달리, 할 일을 다한 한 시간 뒤 안방으로 도로 기어 들어가 잠을 청한다. 그리고는 별별 꿈을 꾼다. 홑몸일 때 잘 먹었던 샌드위치 '서브웨이'에 들어가 한바탕 주문하는 꿈을 꾸고, 과거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가 등장해 어색하지만 설레는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꿈을 꾼다. SF 어드벤처 급으로 카이로 사막을 종횡무진하는 꿈과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시청 앞 광장 건물에서 풋사과 같은 커플을 내려다보는 꿈도… 생생한 꿈은 정말이지 광경이 손으로 만져질 것만 같다. 일장춘몽에 흠뻑 취하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시계는 아침의 시침을 가리키고. 뻐근한 배와 저릿한 허리를 느끼며, 아까보다 충전된 스태미나로 두뇌를 가동해 본다. 뱃속 손님에게 아침 양분으로 뭘 전달할 건지 정하기 위해서. 뭐 먹을지의 고민은 어쩔 땐 즐거운 일이고 어쩔 땐 참 귀찮다.
12주가 지날 때 임신 정보 어플에서 "이제부터 엄마는 입덧이 줄고 '쾌적'한 임신 생활을 하게 될 거예요." 라는 구절을 읽었다. 그때 나는 살면서 '쾌적'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적시에 쓰인 걸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 상태가 얼마나 달라지길래 '편안'도 아니고 '수월'도 아니고 쾌적일까! 이토록 알맞은 표현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매우 사려 깊고 섬세한 성품일 거야, 그리고 왠지 내 또래의 여자일 것 같아, 상상했다. 그리고는 일면식도 없는 글 담당자에게 나는 '사랑스러움'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이후 4주간 쾌적은 커녕 쾌차도 없는 날들에 나는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으며 아, 그건 나의 철저한 짝사랑이었구나를 또 깨달았다.
그리고 16주가 된 이번 주, 다시금 그 담당자가 떠올랐다. 혹시... 이래서 쾌적이라는 단어를 쓴 걸까? 24/7 달고 살던 숙취 같은 매스꺼움이 약간 덜어졌다. 매일 먹는 은은한 집밥 말고 다채로운 맛들까지도 하나둘씩 입 안에 피어오른다. 이 정도를 쾌적하다고 한 것이라면 그래 맞다. 절댓값으로 보면 좋은 컨디션이라 말할 수 없지만 이전과 상대적으로 보자면 맞다, 살만하다! 그러면서 집 나갔다 돌아온 입맛의 시선을 집 밖으로도 두어본다. 아침 일찍 여는 카페에 가서 따뜻한 한 끼 하면 어떨까 여유도 제법 번뜩인다. 생각이 늘어지기 전에 후다닥 고양이 세수를 하고 포근한 옷을 껴 입고 나서는데, 그런데 으아아. 부수입이 쏠쏠하다.
어제보다 더 가을이잖아.
일찍 나오길 잘했다. 사람도 없고 좋네. 브런치 세트 구성에 커피가 포함되어 있어 봄에 만난 게 마지막인,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한 잔 주문해본다. 얏호. 진동벨이 울리고
"커피 먼저 나왔습니다."
하아. 오랜만에 향긋한 한 모금이 입술에 닿고, 그 주위로 웃음이 번진다. 쾌적함의 연쇄 작용이다.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고됨 속에도 쾌적은 늘 있다. 임산부에게 행복은 별 게 아니라 연하게 내린 커피 한 잔, 가을 색깔 그리고 약간은 널널한 마음.
올해도 가을이 돌아왔고 어김없이 겨울이 올 테다.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까 믿기지 않지만... 아기를 만나는 날도 곧 오겠지?
그때가 온다면, 귀 기울여 들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