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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희 Apr 14. 2021

아보카도 계란 간장밥

 하루를 마치며 배가 고프다. 재료를 몽땅 때려 넣고 왁자하게 비벼 먹을 참이다. 몽땅이라고 하기도 거창한, 조촐하지만 완전한 네 가지 식재료 아보카도, 계란, 쌀밥, 간장이다. 요즘은 아보카도가 참 흔하다. 당신은 아보카도를 언제 처음 접했는가?  



 기억이 맞다면 1990년대 중반?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대한민국에는 캘리포니아 롤이란 음식의 새 바람이 불었다. 나는 엄마와 갔던 분수대 사거리 초밥 집에서 그것의 첫맛을 접했다. 휘향 찬란하고 뚱뚱한 음식이 큰 눈을 더 똥그랗게 크게 했다. 특히 그게 새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롤 위에 소복이 놓인 '아보카도'란 것 때문이었다. 연둣빛 야채도 과일도 아닌 이게 뭐야? 우리의 첫 만남은 분명 그 사거리 초밥집이었다.


 아보카도를 처음 접한 때를 남편은 달갑지 않게 회상했다. 그저 (없을)무 맛이었라고 했었나. 나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초밥 집의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빙의한 나는 아보카도에게 이런 평을 내렸다.

이건 고급스러운 맛을 내는 식재료다.

 한 동안 아보카도가 올라간 캘리포니아 롤이 먹고 싶다며 엄마와 그 가게를 찾았다. 그러나 반짝 유행하던 맛이었을까? 아보카도를 뚫고 나오는 마요네즈 맛에 물렸던 걸까? 아보카도 롤을 먹는 횟수는 점점 줄었고, 그것에 대한 애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몇 년 전 새댁이 되어 능숙한 주부 코스프레에 심취했을 때다. 과연 한 사람이라도 날 볼 거란 기대로, 카트를 밀고 장을 보는 행위가 어찌나 어른 같고 재밌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하루는 마트 진열대에 수북이 쌓여있는 그것과 조우했다. 아보카도! 나에게 꽤나 감미로운 첫인상을 가진 식재료 아보카도가 아니던가. 고운 속살과는 달리 까맣고 맨들 단단, 우둘투둘한 겉모습은 내가 한 번도 아보카도의 외형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단 걸 알게 했다. 외강내유 요물 같은 녀석이었다. 반가움에 들뜬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폭풍 검색을 했다. 아보카도 요리 뭐가 있을까?


 네이버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미지는 과카몰리였다. 아, 생각해보니까 남편과 연애할 때 멕시칸 음식점에서 먹었던 과카몰리도 아보카도로 만든 것이었다. 신혼 여행지로 찾았던 멕시코의 칸쿤 식당에서도 나는 메뉴에 나와 있지 않은 과카몰리를 만들어 줄 수 있냐고 용기 내어 물어보기도 했다. 과카몰리는 부드러운 아보카도의 속살을 무스 형태로 으깨서 잘게 썬 토마토와 라임즙, 고수를 넣고 간을 한 일종의 딥핑 소스 같은 음식이다. 바삭한 나초를 찍어 먹거나 퀘사디아 위에 한 스푼 올려서 먹으면 사르르 눈이 감기는 녹진한 맛이다.


 그 거이 참 맛있는 맛인 거 알지만, 저녁 밥상을 차리려던 나는 뭔가 밥다운 메뉴가 필요했다. 다음으로 많이 나온 건 비빔밥의 형태였다. 이게 훗날 자주 먹는 집밥 TOP5에 들 음식일지는 몰랐다. 그럴 대우를 받으실 음식이 아닌데 내가 인색했다. 밥 위에 아보카도와 계란, 명란젓이 올라간 브런치 카페에서 유행하는 음식이란다. 그 날은 세 가지 식재료가 신혼부부의 저녁 메뉴로 점철됐다.


 이후로 나는 아보카도 계란 간장밥(이하 아계밥으로 지칭)을 만만하게 해 먹는다. 명란젓은 어디 갔냐고? 명란젓의 가격을 아는지. 명란은 비싼 음식이다. 두덩이 담아놓고 만원, 이만원 달라하는 고급 찬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명란은 아계밥에서 핵심적인 맛이 아니다. 빼도 무관한 카메오 정도다. 그 카메오가 회당 거액을 요구하는 대스타라면 기를 쓰며 출연시킬 필요가 없다.



 아 아무튼... 잠시 딴생각을 했더니 배가 너무 고프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체 없이 넓은 그릇에 따끈한 흰쌀밥을 푼다. 깊이가 있는 오목한 접시도 괜찮다. 음식이 너무 뜨거우면 어쩐지 후후 불다가 볼장 다 보고 맛의 진가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밥 담은 그릇이 모락모락 한 김 식는 동안 아보카도 껍질을 벗겨주면 딱이다.


 아보카도는 불행히도 겉모습만으로 내막을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몇 군데에서 사 먹어보고 좋은 가게를 뚫는 게 손실이 적은데 아보카도는 마켓컬리 상품이 훌륭하다. 매번 베스트 상품에 오를 만큼 질이 좋고 크기도 큰 편이다. 새벽에 눈 뜨면 현관 밖에 귀엽게 도착해있는 아보카도. 그때부터는 아보카도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 한다. 하루에서 이틀, 후숙 할 시간을 차분히 준다. 며칠 뒤 아보카도의 겉이 까매지고 만졌을 때 약간 물렁해지는 걸 봐서 반을 갈라 오픈한다. 이번에도 역시 배반은 없다. 노오란 고운 과육이 살갑게 반긴다. 반으로 나눈 과육에 과도 끝을 미끄러뜨려 스르륵 슬라이스 하니, 삭삭 감기는 손맛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이 정도 부드러움이면 얼마나 맛있을까! 숟가락으로 잘 퍼낸 아보카도 슬라이스를 밥 위에 올려놓고 잠시 대기한다. 비빔밥은 5분 만에 50%나 만들어졌다.


 박차를 가해보자. 나머지 30%는 계란 프라이다. 계란은 최대한 적은 양을 사서 부지런히 먹고 새 계란을 사다 먹는 게 맛이 좋다. 집에 있는 가장 작은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다. 딱 2개를 완성도 있게 만들 거기 때문에 열을 컨트롤하기 쉬운 작은 프라이팬으로 한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가 있으면 올리브유를, 없으면 아무 식용유를 둘러도 좋지만 계란 프라이의 동물성 기름에서 풍기는 묵직한 향과 산뜻한 올리브유 향의 조합은 가히 매혹적이다. 기름 양은 프링글스 원기둥의 밑둥 크기 정도 붓는다. 그리고는 약불로 맞춰주는데 이때 다른 볼일의 유혹을 꾹 참고 팬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다. 탱글한 반숙 계란의 성패는 기름의 온도가 좌우하기 때문이다. 기름 표면이 약간 일렁이듯 달궈지는 때를 기다리다가 눈치껏 이때다, 싶은 순간을 포착해서 계란 하나를 톡! 깨뜨린다. 흰자가 마치 물에 익힌 수란처럼 보들 촉촉하고, 노른자가 윤기 좌르르 하게 찰랑거리면 '아계밥'의 계란 완성이다. 그럼 또 5분 만에 80%가 달성된다. 뒤집개로 반숙 계란을 살포시 들어 올려 아보카도 옆에 안착시킨다.


 이제 남은 19%는 간장이다. 나는 웬만하면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좋은 간장을 산다. 간단한 음식일수록 풍미가 뛰어난 간장 한 숟가락이 맛을 업그레이드 시켜줘서다. 일본식 '쯔유'를 넣어 먹을 수도 있지만 쯔유를 만들 때 들어가는 가다랑어포 맛이 어쩐지 텁텁하다. 한국식으로 숙성한 향긋한 간장이 아보카도 비빔밥과도, 다른 음식들과도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끝났다. 이제 요리도 맛도 끝났다. 음식을 완성할 마지막 1%는 비비기 스킬. 아보카도가 그릇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살살살, 그러나 형체가 남아나지 않도록 과감히 비빈다. 이건 누가 어떻게 비비건 간에 맛의 대세를 크게 흔들지 않기 때문에 1%다. 숟가락으로 푹 누르면 문드러지는 크리미 한 아보카도와 터져서 흘러내리는 계란 프라이의 노른자는 이탈리아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먹어본 chef's 소스 맛에 당당히 견주고 싶다. 탱글한 흰쌀밥에 빈틈없는 꼬소함이 코팅된다. 계란 노른자는 어떻게 이런 '다크하고 묵직한' 고소한 맛을 선사할까? '풍성한데 신선한' 고소함의 아보카도는 어째 이리도 재기 발랄한가. 싶을 찰나에 짭짤 구수한 간장이 훅 치고 들어온다. 거기에 대체 불가한 쌀밥의 달큰함이 씹을수록 입안에 쫙 퍼지면, 진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입꼬리가 스르르 딸려 올라가는 맛이다.


대충 담을수록 맛있는... 건 아니고 너무 배고팠어


재료 소개

아보카도 한 개: 2500원

계란 한 알: 300원

간장 한 숟가락: 약 200원

흰쌀밥 한 공기: 약 300원


 3,300원의 가치가 33,000원어치가 되는 순간이다. 맛도 맛이지만 영양소의 3대장, 단탄지(단백질 - 탄수화물 - 지방) 삼박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고상한 박수  번을 치게 만든다. 짝짝짝... 음식을 만들  들인 10분의 시간, 먹는데 들어간 20분의 시간을 이렇게 쫀쫀한 행복으로 채우다니.  필요한 만큼의 먹을 것과 나의  가지 취향, 최소한의 돈과 시간. '최소한'으로 '최대한' 누렸다는 느낌이  때면 마음에 군더더기가 사라진다. 넉넉하고 산뜻하다. 그래서  음식은 가성비와 가심비의 표본이다. 소파에 기대어 편안하게 소화되는 장을 뚜드린다. 오늘 하루도 괜찮게 살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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