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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사이코 사피엔스의 꼬리를 밟았다(1)

이득과 피해, 느낌이 다른 이유는?

by 김톨
AI 생성 이미지 / 뤼튼



출근길에 차 막힌 게 뭐가 그리 심오해



평상시 내 출근길은 차가 조금 막히긴 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간선도로로 진입하는 입구부터 차들이 삐뚤삐뚤 엉망으로 줄을 서 있었다. 모두들 빨간 브레이크등만 밝힌 채 멈춰 서 있는 모습.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접촉사고가 났을까?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다른 길은.. 흐음.


루틴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재수 옴 붙었다면 그쪽이 더 막힐지도 모른다. 어쨌건 뭐 출근은 해야 되니까. 그리고 아직 시간이 일러서 지각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고민을 포기했다. 그래 여기만 지나면 괜찮을 거야.


하지만 진입로를 지나 간선도로에 합류할 무렵, 나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5차선이나 되는 본선 역시 차량들이 꿈쩍도 못하고 서 있었다. 뭔가 대형사고가 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얼마 전 회사 동료에게 들었던 자유로 사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출근길에 초대형 탱크로리 트럭이 사고로 전복되어, 공교롭게도 모든 차선을 가로질러 막아 버렸다고 했다. 마치 강물을 막고 있는 댐처럼 말이다. 동료는 그날 아침 2시간을 지각했다.


나는 그때를 떠올리면서 '오늘은 내 차례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불가피한 사고라면 뭐 어쩔 수 없지, 천재지변급인데.'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의 선한 이해심은 잠시 후 분노로 돌변했다. 1시간을 허비해서 평상시 15분 만에 지나칠 구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 근처 어딘가에서 사고가 났을 거라 생각하며 도로 앞쪽을 살폈다. 그런데 사고는 무슨! 생뚱맞게 도로보수공사 표지판이 보이는 것 아닌가. 옆에는 또르륵 또르륵 노란색 화살표가 명멸하고 있었다. 5개 차로 중 3개가 막혔고, 1,2차선으로만 통행이 가능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시간에 말이다.


짜증 대폭발!!! 이건 완벽한 인재(人災)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갑자기 대형 수도관이 터졌다거나 폭우로 인한 산사태라든지 뭐 그런 긴급한 사정이라야 내 스트레스를 진정시킬 수 있을 텐데. 아무 생각 없는 인재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흥분이 가라앉기는커녕 배신감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핸들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오 아침부터 제대로 빡치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생각지 않는?



사실 나는 비효율적인 행정업무를 비판한다거나 도로 보수공사의 조기경보체계 같은 것을 건의하는 등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쪽의 일들은 성격상 내가 참.. 잘하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다. 정작 내 머릿속을 맴돈 것은 조금 엉뚱한 아이디어였다.


그날 나는 납득할 수 없는 교통체증으로 매우 화가 많이 났다. 그렇다면 반대의 상황, 즉 그 정도의 체증이 없는 평상시 출근길에 나는 왜 매우 기뻐하지 않았을까? 약간 궤변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난 진지하다. 나에게 손해가 되는 상황에서 미칠 정도로 빡쳤다면, 나에게 득이 되는 상황에서는 미칠 듯이 기뻐야 상호 대응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아침 출근길에 차가 막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한다면 그것도 정상은 아니라고 본다. 나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조건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차가 막혀서 시간을 까먹은 상황'과 '소통이 원활해서 시간을 아낀 상황' 두 개를 비교한다면,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전자에 대해서는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기뻐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유가 뭘까? 또 다른 상황도 생각해 보자. 앞서 얘기했듯이 얼마 전 나의 회사 동료가 2시간을 지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동료에게 고생했다는 형식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고 그게 끝이었다. 동료에게 더 할 말도 없었고,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곰곰 생각해 보면, 타인이 겪었던 악재가 나에게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기쁘게, 아니면 최소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볼 여지는 있지 않을까?


점점 복잡해진다. 정리가 필요하다.


(1) 악재를 만난 상황 : 탱크로리가 됐든 보수공사가 됐든 출근길에 악재를 만나 지각을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다면.


(2) 호재가 발생한 상황 : 정반대로 어느 날 하루는 도로에 차가 거의 없어서 평상시보다 출근시간이 절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기분이 좋고 즐거움이 넘쳐야 맞는 것 같다.


좀 다른 케이스.


(3) 악재를 피한 상황 : 어떤 사고가 다른 곳에서 벌어졌는데 다행히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또한 행복한 일 아닌가?


상식적으로 보면 (1) 상황에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할 테다. 다들 화나고 스트레스받는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없다.


(2) 상황에 대하여 사람들은 보통 '나쁘지 않아 좋긴 한데 이게 감사해야 할 정도인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딱 여기까지다.


(3)에 대해서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벌어지지도 않은 일 가지고 웬 호들갑? 세상 어딘가에는 항상 사고가 나고 있을 텐데 그럼 매일 매 순간 감사하고 살아야 되나?'


내 생각도 별반 차이 없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하다고 생각한 포인트가 있다.


(2) 나쁘지 않은 것 맞고, (3) 틀린 말 아닌 것도 맞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2)와 (3)의 상황에서 조금은.. 약간은.. 기쁘거나 감사하다는 생각을 분명 갖고는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화나고 기쁜 레벨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즉 (1) 상황에서 우리가 화를 내는 강도와 (2), (3)의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강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세 가지 시나리오들을 맞닥뜨렸을 때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강도만 놓고 본다면 그 크기는 이런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각성자 카너먼의 통찰



필자가 재구성한 위의 에피소드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는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과 그의 동료학자였던 아모스 트버스키 Amos Tversky 의 아이디어를 우리 일상생활에서 응용한 것이다.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경제학과 심리학의 융합학문인 행동경제학 Behavioral Economics 분야에서 여러 편의 기념비적인 논문들을 남겼고, 2002년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이들과 비슷한 연구를 했던 사람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는 '넛지 Nudge'의 저자이자 201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차드 탈러가 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정도 되는 인물은 '각성자'급이라 할 수 있다. 각성자 카너먼은 그의 역작 '생각에 관한 생각 THINKING FAST AND SLOW'을 통해 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통해 의미심장한 많은 결론들이 도출되었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손실과 이익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다는 대목을 이야기하고 싶다.




예컨대 100만 원으로 주식 투자를 해서 10만 원의 손해를 본 경우와 10만 원의 수익을 낸 경우 두 가지를 비교해 보자. 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확실히 두 가지 경우에 대하여 다르게 반응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10만 원의 이익이 났을 때 보다 10만 원 손해 봤을 때를 더 싫어한다.


이쪽 분야의 전문용어로는 손실회피 Loss Aversion 성향이라고 한다. 즉 이익이 난 것은 괜찮지만 손해 본 것은 곧 죽어도 못 참아!


오늘 필자가 재구성한 출근길 교통정체 에피소드는 위와 같은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손실회피 성향을 일상생활에서 한번 살펴 본 것이다.


이제 중간 결론을 내려보자.


이론적으로 볼 때 (1)의 상황에서 화가 난다면 (2), (3)의 상황에서 기쁨을 느껴야 된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은 (1)의 상황에 분노하지만 (2), (3)의 상황을 감사하게까지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또 궁금한 것이 생긴다. 이런 식의 이론과 현실의 괴리는 도대체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카너먼도 언급한 바가 없다. 다시 찾아봤는데도.. 없다. 나는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방금 언급한 카너먼의 실험을 다시 곱씹어 보기로 했다. 각각의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하는 민감도가 다르다.

노파심에서 미리 얘기할 것이 하나 있다. 지금 필자는 (2), (3)의 상황에서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생각이 전혀 없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논의는 학문의 영역을 벗어난다. 종교의 영역 가까운 그 어디쯤까지 가야 된다. 필자는 그곳까지 갈 생각이 없다.


또 다른 어떤 분들은 (1)의 상황에서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그 일을 교훈 삼아 더 나은 삶이 펼쳐질 수 있으니 오히려 행복하게 여겨야 된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런 유형의 실천론적인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아직 관심이 없다. 나중에는 모르겠다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될 것은 인생의 존재론적인 문제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은 부분이 필자의 관심분야이다.


약간 옆길로 샜다.


내가 관심을 갖고 파고드는 지점은 '왜 이렇게 (1)과 (2), (3)의 상황에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강도에 차이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물어볼 것이고 아는 사람이 없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직접 궁리해 보려 한다.




(2화에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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