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실회피성향 Loss Aversion 오늘 그 끝을 본다
우리는 지금 ‘득이 되는 상황에서 느끼는 기쁨과 실이 되는 상황에서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에 대해 궁리하고 있다. 이런 궁리를 왜 하는가? 지적 호기심? 그것도 가능한 얘기겠지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이 대목에서 헷갈려 버리면 독자들이 이번 연재를 따라오는 의미가 없다. 필자의 이번 연재 노바 오딧세아는 '사람' 그리고 '인간학'을 지향한다. 사람에게서 벌어지는 다양한 층위의 심리적 현상들을 잘 살펴서 결국엔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일 나쁜 일은 수도 없이 교차한다. 좋은 일에 기쁨 한 스푼, 안 좋은 일에 슬픔 한 스푼이면 합쳐서 똔똔이다. 최소한 불행한 인생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깐깐한 노벨상 심사위원들의 빡센 검증을 통과한 카너먼이라는 사람은 좋은 일에서 얻는 기쁨보다 나쁜 일에서 느끼는 고통이 더 크다고 하니. 이것 참.. 이러면 항상 마이너스 인생 아닌가. 불교에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인가?
지난 연재 말미에서 얘기했다시피 그 원인이 무엇인지 카너먼은 제시하지 않았다.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솔직히 좀 든다. 대신 그런 현상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발생하는지를 분석했다. 이제 나는 이스라엘이 낳은 천재 대니얼 카너먼의 주장을 낱낱이 살펴보려 한다.
카너먼의 가치함수
먼저 카너먼은 방금 얘기한 추상적인 개념을 xy 좌표평면에 아래와 같은 그래프로 그렸다. 아래 그래프는 1979년 그의 논문에 실린 실제 그래프를 화면 갈무리한 것이다.
이건 손으로 그린 그래프가 아니다. 수식에 의해 도출된 원인과 결과의 궤적이다.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수학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건 시쳇말로 개이득이다. 추상이 식으로 표현되는 순간 사람에게 날개가 달린 듯 어디라도 갈 수 있게 해 준다. 일단 차근차근 살펴보자.
가로축(x축)은 가운데 0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x>0) 이득을 보는 구간, 왼쪽으로 가면 (x <0) 손해를 보는 구간을 표시한다. 세로축(y축)은 이러한 이득과 손해를 사람들이 심리적인 효과와 맞물려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나타내는데, 위쪽은 기쁨 아래쪽은 고통이라고 보면 된다. 이것을 카너먼은 가치(Value)라고 표현했다. 전통 경제학에서는 원래 효용(Utility)라고 지칭하던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심리와 수학을 결합시켜 보여준 경이로운 사례라고 생각한다. 노벨상이 괜히 나왔겠는가..
이제 이 놈을 갖고 한번 지지고 볶아볼 차례다.
인간은 이득보다 손실에 더 민감하다
복기를 한 번 해 보자. 필자의 이번 포스팅 초반의 문제의식은 출근길에 차가 막히면 고통스러운데 차가 안 막히면 왜 그 정도로 기쁘지는 않을까 하는 문제였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그 메커니즘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람들이 손실을 보았을 때 느끼는 고통(가치)은 이득을 보았을 때 느끼는 기쁨(가치) 보다 더 가파른 기울기를 가진 곡선으로 그려진다.
쉬운 숫자를 예로 들어보자. 아래 그래프에서 x = 1인 경우의 y 값은 0.8이다. 이득 한 스푼에 기쁨도 거의 한 스푼 가까이 된다. 하지만 x = -1 즉 손해 한 스푼에는 고통이 2.2 나 된다. 동일한 크기의 이득 한 스푼과 손해 한 스푼에 대해 우리 인간은 그 가중치를 달리 평가한다는 얘기다.
카너먼은 이런 걸 어떻게 그래프로 그릴 수 있었을까? 그냥 감으로? 대충 그러려니 해서? 그건 말이 안 된다. Econometrica라는 특급 학술지에 정식 게재된 논문이다. 어마어마한 검증 과정을 통과해야 된다. 특히나 이 논문에서의 카너먼의 주장은 기존 전통경제학의 주류학설 '기대효용이론'을 뒤집는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카너먼이 실행한 방법은 사실 기술적으로는 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그는 스톡홀름대학과 미시간대학의 대학원생들을 수십 명 모아 놓고 그룹을 나눠 질문을 했다. 요렇게 하면 얼마의 이득과 손해를 볼 수 있고 저렇게 하면 이득은 좀 줄어들지만 손해도 같이 줄어드는데 너라면 어떤 걸 선택하겠니?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던진 다음 거기에 응답한 대학원생들의 설문결과를 종합하여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참 별 거 아니다. 그런데 이런 걸로 노벨상이 나온다.
우리는 언뜻 출근길과 관련한 최초의 질문에 대해 답이 나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카너먼은 ‘득이 되는 상황에서 느끼는 기쁨과 실이 되는 상황에서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확인했고 그 결과를 수식으로 만들어서 그래프로 시각화했을 뿐이다. 또 손실회피계수란 지표를 만들어내서 그 값이 최소 2를 넘는다는 얘기도 했다. 손실에 대한 고통은 이득에 대한 기쁨의 두 배를 넘는다는 얘기다. 잘 보면 이건 답이 아니라 최초 우리가 제기했던 문제를 재진술한 것에 불과하다.
왜 이득보다 손실에 민감한가? 그 이유는?
그러나 카너먼은 온전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발견해 냈다. 그것은 바로 기준점 Reference Point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래프를 보면서 이득과 손실을 x축에 표시했다고 얘기했지만 카너먼이 보기에 사람들은 이득과 손실이란 것을 자기가 설정한 어떤 기준점과 비교해서 판단한다고 보았다. 조금 유심히 살펴보면 위의 그래프에 0이라는 표시는 어디에도 없다. 보통 우리가 수학공부할 때 저런 xy축의 중심에는 항상 0이 있었지 않았나. 하지만 0이 아니다.
카너먼은 이득과 손실이라고 하는 것은 내 것을 과연 어디랑 비교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때 비교하는 상대방의 역할을 하는 바로 그것을 기준점 또는 참조점이라고 지칭했다. 따라서 위의 그래프에서 xy축의 중심은 0이 아니라 기준점 r 이 된다.
내 월급을 만일 400만 원이라면 이 사실만 놓고 볼 때 이득도 손실도 없다. 나는 단지 월급을 400만 원 받았을 뿐이다. 마음도 평온하다. 절대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1) 한 달에 꼬박꼬박 나가는 고정지출이 450만 원이다. 2) 알고 보니 내 옆에 있는 직장동료는 월급을 350만 원 받고 있었다.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1)의 경우라면 이 월급으로는 계속 적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2)의 경우라면 대놓고 티는 못 내지만 왠지 더 인정받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1)의 기준점은 450만 원인 반면 2)의 기준점은 350만 원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준점이든 참조점이든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득과 손실을 다른 것과 비교해서 인식한다는 점이다. 비교하지 않는다면 이득도 손실도 없다. 그런 다음 그 이득과 손실에 대한 판단을 가치에 연결시킨다. 가치는 행동을 유발한다. 뭔가 조금씩 연결이 되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꼬깃꼬깃한 나의 메모지를 한번 들여야 보자. 지난번에 뭐라고 써 놓긴 했는데..
우리는 필자의 지난번 무협지 에피소드의 말미에 위와 같은 메모를 남겨뒀었다. 이제 보니 여기에 '비교'라는 것이 적혀있다. 그때의 생각은 이랬다. 웹소설은 흥미위주의 엔터테인먼트다. 사람들은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는다. 그래서 인기 있는 웹소설에는 사람들의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남성향 웹소설 히트작들의 대부분은 폭력을 소재로 하여 가속성장을 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최근의 웹소설 트렌드는 회귀, 빙의, 환생이라는 새로운 클리셰를 활용한다.
원래 없던 이 새로운 컨셉으로 남들보다 더 신속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재미를 보여주면서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남들보다 더 빨리 많이 성장' 이걸 우리는 비교라고 보았다. 무협지 에피소드 때 메모에 적어놓은 '비교'와 오늘 만나고 있는 카너먼의 '비교'는 서로 동치인가? 이건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하자.
옆 길로 새면 안 된다. 자 다시. 우리가 짚어보고 있는 손실회피성향 Loss Aversion, 즉 ‘득이 되는 상황에서 느끼는 기쁨과 실이 되는 상황에서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과 연결시켜 보자. 지금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이쪽 분야의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은 '기준점을 지키려는 인간의 심리적 방어기제로 작동한 것'이 손실회피성향의 원인이라는 의견이 있다. 방어기제 나왔다. 이건 심리학 용어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지키려는 마지막 보루가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해.. 이걸 지키는 것은 어쩌면 계산상의 이득과 손실을 떠나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직결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나 정도라면.. 학교는.. 차는.. 가방은.. 집은.. 투자수익은.. 배우자는.. 아이는.. 이걸 지키는 것은 당연한 거고 이걸 못 지켰을 때 그 고통은 차마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이 될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10만 원의 이득과 10만 원의 손실에 있어서, 이것이 내가 아닌 남의 문제라면 완벽히 서로 동급의 가치를 지니겠지만, 여기에 '내'가 개입되는 순간 사람은 자신만의 기준점을 갖게 되고, 기준점이 존재한다면 기준점을 상회하는 이득과 기준점이 무너진 손실에 대한 심리적 크기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내 기준점은 너무 소듕하니까..
뇌 안에서 손실 담당자는 편도체
이제 Loss Aversion 논의의 끝자락까지 다다른 것 같다. 우리의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는 뇌과학 쪽의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심리학이 경제학과 융합하여 행동경제학을 만들어냈는데, 요즘은 다학제 간 융합이 더욱 활발해져서 이제는 뇌과학과 경제학이 결합된 신경경제학이란 것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오늘 이 문제에 관한 신경경제학 쪽의 입장이 있다. 사실 뇌과학은 앞으로 펼쳐질 김톨의 인간학 여정에 주연급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어쨌건.
현재 뇌과학 분야에서 뇌를 관찰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 fMRI를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질 때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진보된 방법은 일론 머스크가 관여하고 있는 뉴럴링크의 BCI라는 것이다. 이건 뇌와 컴퓨터를 특수한 바늘로 연결해서 영상의 해상도를 훨씬 더 높인 다음 직접적인 전기자극을 주고받는 장치이다.
이런 것들을 활용해서 사이먼 배런-코언 (Simon Baron-Cohen)을 위시한 일군의 학자들이 2007년 ToM (Theory of Mind)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 바가 있었다. Loss Aversion 현상도 이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연구의 결과로 그들은 내가 보기엔 아주 흥미롭고 신박한 결론을 내렸다.
동전 던지기 도박을 하는 경우, 손실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뇌 섬엽(Insular Cortex)에 위치한 편도체(Amygdala)가 활성화된다. 원래 이 부위는 고통과 위험을 처리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측좌핵(Nucleus Accumbens)이 활성화된다. 여기는 보상과 쾌락을 담당한다.
이건 정말이지.. 먼 여행지에 가서 딱 내 스타일인 호젓한 카페를 만난 기분이랄까. 필자가 뇌과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유튜브에서 김주환 박사의 강의를 들으면서부터였다. 그분은 현대인이 갖는 스트레스란 기본적으로 편도체가 활성화됨으로써 파생되는 현상인데, 이 편도체란 놈은 인간이 원시시대 때부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무기에 속한다는 얘기를 했다.
원래는 꼭 필요한 녀석인데 쓸데없이 자꾸 활성화되니까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편안하게 있지를 못한다.. 이런 내용이다. 그분이 아믹딸라 아믹딸라 하면서 발음하던 음성도 지금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런데 Loss Aversion을 파고들다가 결국 마주친 것이 편도체 이 놈이라니..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결국 Loss Aversion의 문제는 스트레스의 주범이기도 한 편도체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뇌 안에서 손실 담당자와 이득 담당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제 다 왔다. Loss Aversion 현상은 분명 우리의 심리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것의 실체는 fMRI로도 측정되는 실제 작동 중인 심리적 방어기제였다. 또한 이득은 보상회로를 작동시키고, 손실은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이제 보니 이 둘은 엄연히 다른 놈들이었다.
김톨의 인간학 여정은 마음의 평화를 추구한다.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열쇠는, 어쩌면 우리 머릿속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편도체 안에서 방어기제를 주무르면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바로 그 놈을 어떻게 해 버려야 되는 문제일 수 있다. 분명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조금은 정리가 된다. 이젠 메모지를 손 볼 시간. 나중에 이것들을 다 붙여서 한꺼번에 펼쳐놓으면 볼 만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카너먼을 이대로 떠나보낼 생각이 없다. 그에게서 뽑아먹을 것이 아직 남아 있기도 하고. 또 내 머릿속에서 한 가지 중대한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많은 이득을 추구하고 이는 가치함수를 통해 높은 가치로 연결된다. 하지만 가치함수의 x축에 표시된 이득과 손실에는 실현가능성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지금의 가치함수가 참이라면 발생가능성이 매우 낮은 로또 당첨에 엄청난 가치가 부여된다. 어떤 바보 같은 인간들은 그 가치만 보고 실현가능성은 살피지 않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인 가치평가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
*주1) Daniel Kahneman, Amos Tversky : "Prospect Theory : An Analysis of Decision Under Risk," Econometrica, Vol. 47, No. 2. (Mar. 1979), pp.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