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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꺾였지만 내려놓지 않았군

카오모스 프리퀄

by 김톨





올 연말에 꼭 승진해야 되거든요




"마차에서 내려 걸어간다는 얘긴 그냥 딱 들어봐도 좋은 건 아닌 것 같네요. 그런 거 맞죠?"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건 너무 단편적인 해석이다. 지금까지 도민기가 시간을 끈 게 얼만데. 그냥 마차에서 내린다니 썩 좋지 않군요.. 하면서 끝낼 수는 없다. 그래도 여긴 프로페셔널이 진행하는 유료 상담 아닌가. 의뢰인의 전후사정을 짚어야 되고, 그것을 토대로 다시 한번 괘사와 효사 그리고 행간의 의미를 살펴야 된다. 그런 의도에서인지 여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자꾸 헛다리 짚지 말고. 인제는 얘길 좀 해야겠지. 뭐가 왜 궁금한지."


도민기는 또 잠깐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젠 얘길 해야 되겠다 싶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 봐. 어차피 얘기할 거 진작에 하지.


"저기.. 그게.. 승진 문제거든요.”


도민기는 그때부터 벙어리 말문 터지듯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과거사를 설명했다. 하도 많이 떠들어대니 여 노인도 까먹을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꼬깃꼬깃한 노트에 대충 몇 자 끄적여 놓긴 했다.


그는 강남 대치동 출신이었다. 사교육의 힘을 굳게 믿었던 부모는 전세살이를 불사하면서까지 무리를 해서 대치동에 진입했다. 부족함 없이 선행교육과 학원 뺑뺑이로 10대 시절을 보냈지만, 세상일이란 원래 내 맘 같지 않은 법. 결국 의대도 실패, SKY 입성에도 실패했다. 안 되겠다 싶어 차선책으로 택했던 것이 바이오 학과. 도민기는 이 과정에서 자존심을 많이 구겼다. 일시적이었지만 원형 탈모증이 왔다고도 했다. 물론 인서울 사립대 생명과학 전공도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수시로 들어가려면 내신 1등급 초반 아니면 대기도 못 건다. 이렇게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닌데.


"기껏 승진운 때문에 그리 뜸을 들인 건가?"


"이번에 꼭 해야 됩니다.“


"왜 꼭 이번이어야 하지?"


"이번에 하면 남들보다 빠른 발탁승진인데, 그러면 주변에 얘기하기가 좋죠. "


"주변에 얘기하는 게 승진 목적인가? 월급 올라가고 직책 올라가고 그런 거 아니고?"


이 친구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바이오 같은 생명과학 분야 역시 최첨단 분야이고 성장성도 뛰어나다. 여길 들어갔다고 해서 자존심이 구겨진다? 진짜 힘든 학생들이 본다면 정말 헛웃음이 나올 일이다. 하지만 도민기는 대학 입학 때 한번 B급이라는 멍에를 스스로에게 씌웠고, 대학 졸업 무렵에는 두 번째 멍에까지 덮어쓰게 된다. 친하게 지냈던 과동기들은 대부분 이름만 얘기해도 설명이 필요 없는 대형 제약회사에 순풍순풍 입사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몇 번의 낙방을 거친 후 도망치듯 아무도 모르는 바이오 벤처회사애 들어갔다. 대입 때랑 똑 닮은 프로세스였다. 항상 꿩 대신 닭이고. 원하는 건 A급인데 현실은 B급.


"대학 때 친했던 애들하고 모임이 있어요. 얼마 전부터는 여친들도 동반해서.."


"좀 비교되겠네."


"그쵸. 근데 지난달 모임 때 자연스럽게 회사 얘기가 나왔는데, 그때 제 여친이 맘이 좀 많이 상했나 보더라고요."


한 달 전, 합정동의 한 오마카세 고깃집. 민기와 그의 여친이 포함된 MZ 남녀 여섯이 기분 좋게 불금을 즐기고 있었다.



- 여기 맛은 진짜 괜찮은데 가격이 넘 비싸다. 그치.


- 뭐 그렇긴 한데 맨날 먹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이제 이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나?


- 어이구 잘 났다 친구야. 요번에 인센티브 좀 받았다 이거지?


- 돈은 내가 버냐? 회사가 벌지. 워낙 팍팍 벌어대니까 조금씩은 직원들한테도 인센을 주더라고. 회사 전체로 수익 난 거랑 비교하면 티도 안나는 수준이지.


- 참 민기 너네 회사는 아직은 돈을 못 벌테니 인센은 힘들 거고. 대신 자사주 주겠네.


- 어. 우리.. 자사주 대리급부터 준대.


- 자사주가 짱이지. 우리 회사는 턱도 없어. 주가가 얼만데 에이 그걸 주겠냐.


- 너네 대리 진급 하려면 얼마나 걸려?



자리가 파한 뒤, 민기와 그의 여친은 지하철역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말없이 걸어가다 어느 순간 여친이 걸음을 멈추더니 민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기 회사 돈 못 벌어?"


민기의 여친은 원래 심성이 착했다. 그런데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돈 못 번다는 얘기에 심기가 불편했는지. 그걸 콕 집어 물어본다. 사실 벤처기업이 돈 못 버는 건 흉이 아니다. 어차피 연구개발 단계에서는 손가락 쪽쪽 빨다가, 임상 통과하는 순간 또는 그 무렵에 코스닥 상장해서 주식으로 대박 치는 것이 그들의 정형화된 코스다. 그에 비해 민기의 친구들이 다닌다는 기성 제약회사나 바이오시밀러 업체들은 대박을 낼 수가 없다. 이미 클 대로 다 컸는데 대박은 무슨..


"아.. 우리 회사.. 지금 신약 개발하고 있는 거 내후년쯤 임상실험 마치면 그땐 매출 발생하니까 돈 좀 벌게 되겠지.“


"그럼 인센은 내후년이나 돼야 받을 수 있는 거야?"


"아니 자기야. 그게 인센도 좋지만 자사주가 더 좋은 거거든. 아까 걔네도 부럽다고 했잖아."


"대리급부터 준다며."


".... 아마 이번 연말에 특진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얘기를 들으면서 여 노인은 가끔 입맛을 다시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하지만 여 노인은 시종일관 왼쪽 팔은 팔짱을 꼈고 오른손으로는 아래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후배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는데..



"뭔 소린지 이제 이해가 되는군. 알았어."


"그냥 알았다고만 하시면."


"보채지 말고."


여 노인은 턱을 쓰다듬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민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개인사정을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이해가 되네.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두 가지는 여전히 납득이 안돼. 지금 자네는 딱 절반만 얘기했어, 남은 거 다 풀어놔. 그래야 점사가 제대로 나와."


"하아.. 어르신. 다 얘기했는데 뭘 또요. 아니 이 정도면.."


"지금까지 자네가 솔직히 얘기해 준 것은 고맙네만. 가만있자! 이게 왜 고마워할 일이지? 어쨌건 그 정도는 딴 사람들도 숱하게 겪는 일이야. 그것만 갖고는 자네의 특이한 행동이 설명되지 않아."


"네엡? 특이행동이요?"


"예약도 없이 밤 10시 넘어서 불시에 찾아 온 친구가 정말 사연이 더 없을까? 그것도 술 취해서 왔지. 제일 이상했던 거는 점부터 먼저 쳐 달라는 거였어. 그런 사람은 거의 없거든. 그러니 자 이제 남은 거 다 꺼내놓게. 진짜 마무리해야지 이제."


민기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우와. 사장님 점 보는 분 아니고 혹시 형사세요? 아님 프로파일러?"


"연륜이라고 하지. 자네 정도는 점 안 쳐도 딱 보면 알아."


"끄응"


체념한 듯 도민기가 마지막 비밀, 제일 중요한 비밀을 오픈했다.


"제가요. 사실 오늘 바로 밑에 후배랑 한 잔 하고..."


그 후배는 낙하산이란 얘기도 있었지만 어쨌건 아주 똑똑한 친구였다. 집에 돈이 많았는지 대치동이 아니라 영어유치원과 국제학교 코스를 밟았다, 찐 스카이캐슬이다. 학교도 SKY가 아닌 미국 존스홉킨스를 나왔다. 그런데 졸업하자마자 귀국해서 도민기의 회사에 입사했다. 물론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지만, 그 후배가 한국에 그것도 조그만 벤처에 들어온 것은 솔직히 미국이나 유럽의 글로벌 빅파마 제약사 쪽에 자리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후배에겐 상처였다.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 마음고생이 많다.


결론인즉슨, 도민기와 그 후배가 바로 그날 우연찮게 번개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대화 중에 후배가 정말 쌈박한 아이디어를 냈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맡아서 추진할 생각이 없다고 했단다. 적당히 장단 맞춰주면서 듣고만 있던 도민기는 후배가 그 일을 추진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에..


"그래서 자네는 그 아이디어를 팀장한테 자네 것인 것처럼 보고하고, 일을 추진한 다음 특진시켜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는 거네."


"... 부끄럽지만 맞습니다. 그래서 점을 먼저 쳐 달라고 말씀드린 거였어요. 점괘가 승진하는 쪽으로 나오면 굳이 후배 아이디어를 도둑질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승진 안 되는 걸로 나오면 어차피 후배는 신경도 안 쓸 테니 제가 그 아이디어를 추진하려고 한 거죠."


"쯧쯧, 양심이 아직 절반은 살아있구먼. 그건 다행이네."


여 노인의 얼굴 표정이 조금은 펴졌다.


"자, 이제 점괘를 다시 일러줄 테니 잘 듣게. 주역 22번 비괘 산화비, 그중에서도 자네는 첫 번째 양효 초구를 뽑았지. 그런데 이 동양학이란 것이 말이야. 정말 재밌는 게.. 좋고 나쁜 게 뒤죽박죽이야. 무조건 좋고 무조건 나쁜 건 없단 말이지."


이제부터는 여 노인의 시간이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녹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본괘의 괘사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아름다움이야. 일단 좋은 점괘 맞아. 그런데 좀 전에 무조건 좋기만 한 건 없다고 그랬잖아. 문제는 이게 장식된 아름다움이란 거야. 이 괘는 위에 산이 있고 아래에 불이 있는 모습이거든. 그래서 이름에 산화가 들어갔어. 아래에 불이 위에 산을 비춰주니 이게 간접조명이지 뭐겠어. 일단 이쁘고 아름다우니까 좋긴 좋은데, 이게 조명빨 받아서 예뻐진 것이니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아니라는 뜻이야. 희한하지. 그리고 조명 꺼지면.. 어떻게 될까?“


여 노인은 다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와중에 도민기는 수첩에 열심히 뭘 적고 있는 중이었다.


"안 적어도 돼. 다 출력해서 줄 거야."


"어르신 워드도 치세요? 시간이 꽤 늦어지지 않을까요?"


"아니 괜찮아. 어차피 AI가 이미 다 써놨을거야. 내 짬밥에 워드 안 치지. 그리고 자네 점괘는 비괘의 첫 번째 효를 콕 찍어서 나왔어. 변효(變爻)가 하나 뽑힌 거야. 이 첫 번째 양효를 초구라고 하는데 아까 마차 타고 가다 내린다 그랬지? 그러니까 일단 안 좋아. 힘들어진다는 얘기잖아. 그런데 또 그 발이 더 아름답다고 했거든. 옛사람들이 말을 참 애매하게 하지. 나도 입 아프니까 이제 마지막이야. 지금 자네의 실제 상황을 놓고 이걸 짚어 줄 테니 잘 들어."


여 노인은 승진은 어려울 거라 했고, 그 대신 회사나 직속상관 라인에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민기에게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쪽이니, 길게 보면 승진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호재가 될 거라 했다. 그리고 조직에 변화가 생기니 역할이 커질 것이고, 고생은 되더라도 결국 남는 장사라는 말도 덧붙였다. 얘기를 마친 여 노인은 노트북을 힐끔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인마, 이거 한 페이지로 요약해서 프린트해 줘."


수 초도 지나지 않아 프린터에서 용지 말아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민기의 에피소드는 여기까지였지만 그다음 날 나는 여 노인에게 좀 다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한 번 꺾였을 때 내려놓는 것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의 차이에 관한 얘기였다. 또 도민기가 산화비의 초구를 뽑았듯이, 이런 식으로 동전을 던져서 괘를 뽑을 때 변효(*)가 나오는 프로세스를 가만 쳐다보면 그게 양자컴퓨터의 큐비트 연산과 똑같다는 얘기도 했다. 여 노인은 싱크로니시티 때와 같이 이죽거리면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생각 좀 해 보라는 식으로 툭 던졌고, 나는 또 발끈하여 그걸 덥석 물어버렸다. 원래 사주카페 알바는 겨울방학 두 달 동안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날 여 노인과 주고받았던 몇 마디 대화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도 카페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3화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주) 변효(變爻) : 주역의 괘는 여섯 개의 효를 가진다. 가로로 긴 막대가 양효(+), 중간이 끊긴 막대가 음효(-)이다. 변효라는 것은 현재 겉 모습은 양(음)효이지만 조만간 변화가 시작되어 곧 음(양)효로 바뀔 수 있는 효를 말한다. 주역 점을 칠 때 동전을 한 개가 아닌 세 개 쓰는 이유가 바로 변효를 골라내기 위함이다. 동전을 던졌는데 변효가 없다면 괘사를 읽어 점단을 하고, 만일 변효가 몇 개 나왔다면 괘사보다는 그 변효의 효사를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주역에 괘사는 모두 64개, 효사는 총 (384+2)개가 있다.



*이 글은 작자의 상상을 펼친 허구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조직, 각종 사건 등의 소재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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