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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점부터 먼저 봐 주시면 안될까요

카오모스 프리퀄

by 김톨
주역 22번 비괘의 상상 이미지 / Adobe Firefly & Playground


20만 원을 낸 의뢰인이 처음 가게를 찾은 것은 지난 3월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이때는 내가 알바를 시작하기 훨씬 전이라 자세한 얘기는 여 노인으로부터 전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저녁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 신학기라서 낮에는 조금 바쁘지만 늦은 시간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 가게를 열고 닫는 것은 여 노인 마음이다. 노인은 사주카페 내실을 숙소로 이용하고 있어서 출퇴근이 따로 없다. 손님이 있으면 근무시간, 없으면 휴식시간이다.


- 딸랑딸랑


나무로 된 여닫이 출입문이 열렸다. 술을 한 잔 걸쳐서 얼굴에 살짝 취기가 오른 젊은 남성이 혼자 카페로 들어왔다.


“사장님. 점 좀 볼려구요. 혹시 오늘 영업 끝나셨을까요?”


인성이 원래 착한 건지 사회생활을 많이 했는지, 취객 치고는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꽤나 공손했다.


“뭐 늙은이가 이 시간에 딱히 할 일이 있겠나. 근데 자네 술 한잔 먹은 것 같은데?”


“아. 친구랑 조금 마시긴 했는데요. 얼마 안 먹어서 아직은 멀쩡합니다. 하나도 안 취했거든요. 괜찮습니다.”


젊은 친구는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휘휘 치며 대답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 노인.


“아니 내가 안 괜찮아서 말이야. 취객을 상대로 점을 치는 것은 좀..”


노인의 얼굴에는 여전히 고객님용 인자한 표정이 걸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꽤나 칼칼했다. 사태 파악이 되자 금세 얼굴 표정이 달라진 젊은이는 비굴하게 매달렸다. 뭔가 해결해야 될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다. 맨 정신이었다면 저러지는 않을 텐데.


“아이고. 우리 어르신. 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제 얼굴이 술 안 먹어도 원래 조금 붉은 편이거든요. 숫기가 없어서 잘 빨개집니다. 이거 절대 술 취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보세요. 아직 혀도 안 꼬부러졌고. 술냄새도 거의 안 나지 않나요? 하하.”


“…”


여 노인은 멀뚱 쳐다만 볼 뿐 여전히 말이 없다. 젊은 친구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잠깐을 망설였다. 하지만 짜웅이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여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짓고서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마디를 웅얼거렸다.


“사실은 꼭 여쭤볼 게.. 하나.. 있어서요.”


같은 말이라도 목소리 톤이나 속도, 어조, 얼굴 표정 등에 따라 듣는 사람에겐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젊은 친구의 마지막 멘트는 여 노인 아니라 다른 누군가라도 웬만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정말 안타깝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솔직히 술도 거의 안 취했고 말이다. 노인은 턱을 괸 손을 풀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여기 앉아서 일단 결제부터 하게. “


딜이 성사되었다.


젊은 남자 의뢰인의 이름은 도민기. 바이오쪽 벤처기업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그래 우리 젊은 친구. 뭐가 그리 궁금하신가? “


도민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얼굴을 들고 한다는 말이.


“그냥 점부터 먼저 봐주시면 안 될까요?”


흠. 이 녀석 봐라.


“그니깐. 점은 봐 줄텐데 궁금한 게 뭔지 얘기를 해야지. “


“그게 좀.. 제가 사정을 말씀드리기 앞서서 일단 점을 먼저 쳐 주시면 안 되냐는 거죠? 점괘가 나오면 제 질문을 말씀드릴게요.”


“으잉? 신박한 친구네. “


여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하. 자네는 지금 점괘가 어찌 나오는지 간을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질문을 하겠다는 얘기로군. 맞지? 에잉. 쯧쯧. 인생 왜 그렇게 사나. “


“에이. 사장님. 그럴 리가요. 요즘은 개인정보 문제도 좀 민감하고 하다 보니… 하여간 부탁 좀 드릴게요.”


"개인정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점집에 와서 무슨.."


여 노인은 도민기의 울 것 같은 표정에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축객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 노인 역시 보통사람은 아니다. 의사결정 기준이 확실히 달랐다. 노인은 이 젊은 친구가 무슨 연유로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자네는 일단 주역점으로 가는 게 좋겠군. “


노인은 의뢰인이 MBTI로 T형일 것 같으면 주역점, F형일 것 같으면 타로점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주역점이요? 타로 아니고요?”


“그래. 주역점 칠 거야. 자네한텐 그게 맞아 보여. 사실 주역점이나 타로나 비슷비슷한 건데, 주역은 텍스트고 타로는 그림이고 그 정도 차이지. 자 간단하게 빨리 가려면 아이패드 화면 여기를 탭 하게나. 점괘가 한 방에 나올 거야. 근데. 하늘에 점괘를 묻는데 그건 좀 성의 없다 생각되면 동전 세 개를 줄 테니 총 여섯 번 던지게. 마음 내키는 대로 편하게 하면 돼. 결과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까.“


도민기는 동전을 선택했다. 동전 세 개를 모아쥔 손이 살짝 떨렸다. 한 번 던질 때마다 눈을 감고 뭔 생각을 하는지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 진상고객 정도는 아니었지만 요구사항 많고 시간 많이 지체하는 꽤나 성가신 타입이다.


동전을 던질 때마다 여 노인은 노트에 앞면인지 뒷면인지 표시를 해 나갔다. 길고 짧은 막대표시가 이어졌다. 태극기의 네 귀퉁이에 그려져 있는 건곤감리처럼 생긴 문양들이 하나씩 완성되고 있었다.





"이건 주역 64괘 중 22번째인 비괘(賁卦)일세. 산화비(山火賁)라고 부르지."


여 노인은 노트에 메모를 마친 후, 얼굴을 들고 도민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자, 점괘가 나왔으니. 이제 얘길 좀 해 보겠나."


이 어르신 오늘 고객님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자 심문 모드로 들어갈 태세다. 그러나 도민기의 까다로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의지의 한국인 맞다.


"잠시만요 사장님. 하나만 더 여쭤 볼게요. 지금 나온 이 점괘가 저한테 좋은 건가요? 아님 폭망인가요? 그걸 알려주셔야지 제가 질문을 드리죠."


노인의 동공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허허. 이 친구. 자네는 나를 점술가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밑에 부하직원으로 생각하는군. 넌 결과만 알려주면 되고 해석은 내가 한다 이거지?”


민기는 정곡을 찌르는 여 노인의 일갈에 잠시 할 말을 잊은 것 같았다.


“그래 내 알려주지. 과연 자네가 제대로 해석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들은 앞으로 쫄쫄 굶어야겠군. 허허.”


여 노인은 ‘산화비’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비괘라고 부른다네. 자, 원전 그대로 읽어줘 봤자 이해를 못 할 테니 현대식으로 얘기해 주겠네. 일단 한번 들어보게.”


노인은 괘를 '괘'가 아니라 '꽤'라고 경음화하여 발음했다. 조금 신기했는데 이 바닥에서는 원래 그리 부르는 것 같았다.


산의 기슭에 빛이 걸쳤으니 이는 아름다움이라. 다만 장식일 뿐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아닐지니. 가는 대로 두면 작은 이로움이 있어, 현명한 자는 과감하지도 조급해하지도 않으며 진지하게 제 길을 간다.


"우와! 어르신. 방금 이롭다고 하신 거죠? 이야 좋은 거 나왔네요."


"작은 이로움이라고 했다."


"그럼 반만 좋은 건가? 뭐 어쨌거나 좋은 쪽인 거잖아요."


"아직 안 끝났으니 서두르지 말게. 주역에는 괘사와 효사 두 가지가 있다네. 지금 얘기해 준 것은 64괘 중 비괘의 전체적인 해석인 괘사를 읊어준 것이고. 자네가 동전을 던져서 나온 최종적인 점괘는 이 비괘 안에 있는 6개 막대 각각의 효사 중 첫 번째 것이야."


"나름 체계가 있고 복잡하네요. 이거."


"정교한 거지."


"그럼 진짜 점괘는요?"


종착지가 눈앞이다.


22번 비괘의 맨 아래 첫 번째 양효의 괘사는 이렇다.


마차에서 내려 걸어가니, 이제 그 발이 더 아름답더라.


"하아.. 도대체 이게 뭔 소리예요. 어르신."


"자네가 해석한다고 하지 않았나."




(2화(2)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 이 글은 작자의 상상을 펼친 허구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조직, 각종 사건 등의 소재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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