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모스 프리퀄
그날 밤 나는 카페에서 문제의 책, 융의 「싱크로니시티」를 빌려왔다. 여 노인이 볼 수 있으면 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책은 첫 페이지부터 거대한 진입장벽이 쳐져 있었다. 멀리 예루살렘 땅에 있다는 통곡의 벽이 떠오를 정도로 극악한 난이도였다. 분명 한국어가 맞는데.. 사실 난이도가 높다기보다는 문장이 너무 추상적인 것이 문제였다. 어쨌건 수식에 익숙한 나에겐 외계어나 다를 바 없었다. 번역이 문제일까 싶어 영문판을 검색해 봤지만 그것도 도찐개찐이었다.
책을 읽다가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잘 안 되면, 사람들은 부러 목차를 한 번 쓱 훑어본다거나 서문과 부록 같은 것들을 뒤적이거나 하는 식으로 버벅거리는 행동을 한다. 내용이 어려워서 진도가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버벅거림의 와중에도 약간의 소득은 있었다.
이 책은 1951년 에라노스 워크샵이라는 스위스의 한 학술모임에서 발표된 것이며, 볼프강 파울리 Wolfgang Pauli 의 논문과 함께 「자연의 해석과 정신」이라는 책에 같이 합본으로 실린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었다.
가만... 볼프강 파울리? 이 양반은..
나는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는 명분으로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지난가을 4학년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면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양자수학'이라는 선택과목 하나를 수강했다. 이 과목은 양자역학을 물리학이 아닌 수학 측면에서 들여다보는 기초과정이었는데, 과제를 제출하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양자역학을 공부해야 했다.
양자역학 분야에는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불세출의 스타들이 여럿 등장한다.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에르빈 슈뢰딩거... 이름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네임드들이다. 자연과학계의 최종보스로 꼽히는 앨버트 아인슈타인 역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며 이들과의 한판 승부에 참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지난 학기에 공부해 본 바로 볼프강 파울리라는 이름은 절대 그들의 아랫급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파울리를 지칭하여 '나의 정신적 아들(嫡子)'이라 불렀고, 그의 발견으로 인해 인해 지금의 원소 주기율표가 완성될 수 있었다. 즉 파울리가 고안해 낸 양자스핀 개념과 '배타원리'라고 하는 탁월한 통찰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아원자 세계의 실체에 대해 눈만 뻐끔뻐끔 헛다리만 짚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런 자가 바로 볼프강 파울리인데.. 그런데.. 그런데 이 양반이 이 책에 왜 나와? 그것도 자기 논문을 싱크로니시티와 합쳐서 같이 책을 낸다고? 융은 심리학자 아닌가. 것 참 희한하다고까지 했던 것이 어젯밤의 마지막 기억이다.
점심 무렵에 눈을 뜨자 불현듯 파울리 생각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어차피 곧 출근을 해야 되니 가서 여 노인에게 좀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금 나의 관심은 융 보다는 파울리다. 융은 원래 잘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고. 가만있자. 그런데 내가 이런 걸 점쟁이 할아버지랑 얘기해야 되나. 여 노인은 그냥 사주카페 사장일 뿐인데. 물론 외모와 분위기는 싼 티 나지 않고 좀 독특하긴 하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뭐지? 묘한 위화감이 내 머릿속을 헤집는다.
일단 대충 씻자. 출근은 해야 되니까.
난 이어폰을 귀에다 꽂고 숙소를 나와 카페로 향했다. 걸어서 대충 10분 거리다. 연말이라 날씨는 추웠다. 나는 장갑을 낀 채 폰을 들었다. 이렇게 쓸데없는 시간이 생길 땐 게임을 한다. 난 가끔 접속하는 RPG게임을 열었다. 삼국지의 장수들을 등장시킨 보스 클리어링 게임이다. 돈을 안 쓰면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니까 이 게임은 자주 하지 않는다. 전설급 아이템이나 하나 생기면 모를까..
소극장 거리로 넘어가는 건널목.
로그인을 해서 자잘하게 주어지는 출석 보상들을 득템했다. 상태창을 좀 만져주고 인앱 메일함을 확인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우수고객 감사이벤트) 전설장비 획득확률 업그레이드 쿠폰, 10회 뽑으면 무조건 1회 당첨
이건 엄청나다. 전설급 장비를 뽑을 확률은 대개 10만 분의 1이나 높아봤자 1만 분의 1 수준으로 셋팅된다. 그러니 유저들이 환장하고 게임사들이 돈을 벌지. 이런 게 전설급 장비인데 무려 확률 10%를 준다고? 이건 거저지. 아니 거저가 아니라 몇 백만 원 캐시백이나 마찬가지다. 어째 이런 일이. 이 게임 접으면 안 되겠는걸!
소극장 거리로 접어들 무렵 나에게 찾아온 행운의 메일. 난 설레는 가슴으로 뽑기권 버튼을 꾸욱 눌렀다. 뭐가 나올까? 난 내심 '오장원의 부러진 대검'이 나오길 소원했다.
- 1개씩 뽑기 / 10개 한 번에 뽑기
우린 한방에 간다. 난 10개 뽑기를 선택했다. 꼭 이럴 때 분위기 잡느라고 무려 수십 초나 되는 동영상이 재생된다. 원래는 skip 버튼을 신속하게 누르는 게 국룰이다만. 지금은 전설급 장비를 뽑는 신성한 시간이 아닌가. 예의를 갖춰야 된다. 지그시 참고 기다리자.
모퉁이를 돌았다. 카페는 이제 눈앞이다. 전설급 장비를 득템하고 의기양양하게 출근 도장을 찍으면 된다. 확률은 100%. 영상이 거의 다 끝나간다. 화면이 화려하게 번쩍이고 이어폰으로 전장의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 곧..
그 순간 누군가가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난 스마트폰 화면과 카페 문 양쪽에다 거의 동시에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일단 스마트폰이 먼저다. 두구두구 소리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같은 학교 동아리 후배 하은설. 갑자기? 네가 여기서 왜 나와? 근데 일단 모르겠고.. 바쁘니까 일단 가시고.
"어머. 이찬 선배!"
나의 바람과 달리 하은설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거다.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하는 게 맞지. 하지만 그때 순간적으로 느낀 건데 은설의 표정은 보통 때와는 좀 달랐다. 뭔가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는 사이 뽑기 화면은 마지막 카운트 다운으로 치달았다. 10, 9, 8, 7...
"어. 어. 은설이구나. 알았어. 어서 가. 가."
나는 정작 은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훠이훠이 손짓까지 하며 애를 보내버렸다. 알았으니까 일단 좀 가라고.
- 전설급 장비 획득! '적벽의 붉은 방패'
어라. 이건 공격장비가 아닌 방어구다. 이런.. 폭망이네. 그러나 아직 9개 남았다. 하지만 이미 전설급이 1개 나와버렸으니 앞으로 하나 더 나올 확률은 제로라는 걸 나는 모르지 않았다.
- 영웅급 장비...
- 장군급 장비...
어쩌고저쩌고 해서 10개의 장비가 모두 뽑혔다. 줘도 어째 이런 걸 주냐. 에라 모르겠다. 출근이나 하자. 나는 그제서야 스쳐 지나갔던 은설이를 살폈지만 벌써 모퉁이를 돌았는지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나는 밝은 목소리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갈 때랑 똑같다. 하지만 여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 화장실 가셨나..
손님들이 주로 앉는 창가 쪽 테이블 위엔 타로 카드가 몇 개 펼쳐져 있었다. 타로 손님이 왔다 가셨군.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던 카드는 Two of Cups였다. 날개 달린 사자 아래에서 남녀가 황금빛 컵을 마주 잡고 있는 뭔가 예사롭지 않은 카드였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어. 자네 왔는가."
여 노인이 내실에서 나왔다.
"네, 어르신. 잘 주무셨죠? 얼른 정리 좀 할게요. 아 참. 좀 전에 여자애 한 명 나가던데."
"그래 손님이 한 명 다녀갔지. 왜 그러나?"
"걔 뭐 하러 왔대요?"
"의뢰인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 그리고 걔라니? 걔도 성인이야."
"우와. 사장님! 어제 도민기씨 얘기는 그리도 자세히 알려주셨으면서 의뢰인 정보는 못 알려준다고요? 이게 말이.."
여 노인의 눈이 똥그래졌다. 껌벅껌벅.
"크흠. 도민기 그거 가명이야."
왠지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가명이든 뭐든 얘기하신 거는 다 실화잖아요."
"그런 스토리는 도민기 아니라도 여기저기 많아. 얘길 많이 했더라도 어떤 사람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만 않으면 상관없어."
"뭐 정보 한 두 개만 더 있으면 바로 특정될 것 같던데.. 아 참 그리고 방금 나간 여자애 걔 저희 동아리 후배예요.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앤 데."
"그럼 더 못 알려주지. 관심 끄도록 하게. 자, 거기 타로 정리하고 여기 앉아봐. 일 얘기 좀 해야지."
은근슬쩍 잘 넘어간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난 정리를 마친 다음 커피도 한 잔 내렸다. 향이 좋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겨울 햇살도 바싹 건조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래 책은 좀 읽어 봤고?"
"책이요? 싱크로니시티?"
"그래 그거 말일세."
"어젯밤에 가져갔는데 아직 많이는 못 읽었죠. 그런데 내용은 도통 모르겠던데요."
"그러면 좀 곤란해."
"뭐가요?"
"할 얘기가 없잖아. 우리."
우리? 우리가 무슨 연인도 아니고. 할 얘기가 있어야 되나.
"대신 하루에 하나씩 공부를 하면 되겠네. 자네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혹시 좀 배웠나?"
"아 네. 지난 학기에 양자역학은 아니고 양자수학이라고 수강한 게 하나 있었죠."
"그럼 다 알겠군."
"에휴. 알긴요. 수학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머리 터진다고요."
"양자역학에서 제일 기본적인 게 양자중첩이라고 하던데. 그게 뭔지 나한테 얘기 좀 해보게."
"전 양자역학 아니고 양자수학을 했거든요."
"그게 그거지 뭐. 둘 다 똑같은 양자학 아닌가."
"물리학과 수학에는 야구공과 축구공 차이 그 이상의..."
"어허. 그냥 아는 대로 얘기해 봐 봐. 그래도 당신이 이 노인네 보단 잘 알 거 아냐. 명색이 원효대생인데. 쯧쯧."
이 분도 좋게 말해서 안 되면 권위로 밀어붙인다. 이런 것도 본능인가? 그럼 나도 쉽게 가야지.
"에구. 복잡하긴 한데 비유해서 말씀드리자면 어떤 방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고 가정하고요. 그 고양이가 죽어있을 수도 있고 살아 있을 수도 있는데.."
"방 문을 열어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슈뢰딩거가 말했지. 독가스 얘기도 다 아니까. 딴 걸로 해 보게."
에효. 이 분 평범한 노인은 아닌 줄 알았지만. 만만치 않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빛에 대해서 입자설과 파동설 두 가지가 있었.."
"그건 이중슬릿 실험으로 입자 상태와 파동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확인된 거잖아. 됐고. 그건 넘어가지."
'됐고. 그건 넘어가지.'는 우리 지도교수가 자주 쓰는 말투다. 드문 표현은 아니지만 억양까지 비슷한 것은 조금 이상하다 싶었다. 어쨌건 이 양반 이제 보니 모르는 게 없다. 손님 없을 때 책만 보셨나.
"아니, 어르신. 다 아시면서 왜 저한테 물어보셨어요? 억울하게."
"억울할게 뭐 있나. 강자존의 세상인데."
"강자존이 뭡니까?"
"강자는 살고 약자는 죽는다."
흐익. 장래가 촉망받는 동북아 최고 원효대 수리학부생이 사주가게 점쟁이한테 루저 취급을 받고 있다. 안 되겠다.
"기본적인 거는 다 아시니까. 지난 학기 수업시간에 배웠던 거를 말씀드릴게요."
노인의 눈빛이 그전보다는 조금 반짝였다.
"양자에 중첩이라는 특성이 있다 보니 그걸 컴퓨터로 만든 게 있어요."
"양자컴퓨터 말이지.. 근데 그거 아직 멀었다며."
"그건 주식투자하는 사람들 얘기고요... 양자컴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큐비트라고 하는데. 원래 전기는 1 아니면 0, on 아니면 off잖아요."
여 노인은 이제 눈까지 지그시 감고 내 얘기를 경청하고 있다.
"근데 큐비트라는 반도체 칩은 양자중첩 현상을 제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1과 0을 동시에 품고 있거든요. 얘는 어떤 때는 1을 뱉어내고 어떤 때는 0을 내놔요. 이랬다 저랬다 랜덤이에요. 하지만 전통컴퓨터는 그렇게 못하죠. 걔는 항상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니까."
노인이 눈을 떴다.
"아까보단 좀 나은데, 그렇게 설명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어. 이 친구야. 저기 동전 세 개만 가져와보게. 내 직접 큐비트를 눈 앞에서 한 번 보여줄 테니."
방금 그 목소리는 어제오늘 내가 들은 것 중에 가장 진지했다.
"그리고 자네, 점 한 번 배워보겠나. 큐비트도 잘 아는데 말이야."
(4화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이 글은 작자의 상상을 펼친 허구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조직, 각종 사건 등의 소재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