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모스 프리퀄
동전함을 열었다.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더니 그냥 한국돈 백 원짜리 동전 셋이다.
"어르신! 아무리 그래도 이것도 서비스업인데 동전을 좀 그럴듯한 걸로 맞춰야 사람들한테 신뢰감을 주지 않을까요?"
그러나 나의 선의는 곧장 노인의 다다다다 하는 잔소리에 묻혀 버렸다.
"허어. 이넘 보소. 동전 삐까번쩍하다고 사람들이 점쟁이를 신뢰하겠냐. 점쟁이는 무조건 점을 잘 쳐야제. 못난 목수가 연장 탓하는 법이야. 그리고 또 옛날 동전으로 하면 복고풍으로 폼이야 좀 나겠지만 동전 규격이 딱딱 안 맞잖아. 깐깐한 손님들은 앞뒤가 한쪽으로 쏠려서 점괘가 제대로 안 나오는 거 아니냐고 따져요. 이 사람아. 그리고 십 원짜리 동전은 너무 가벼워서 잘 안 뒤집어지는 경우가 많고, 오백 원짜리는 여자 고객들이 쥐고 흔들기엔 좀 크다고. 어른이 다 알아서 하는 건데 초짜 주제에 뭣도 모르면서 난리야. 걍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후아.. 그냥 말 한마디 건넨 건데 본전도 못 건졌다. 어이구 우리 영감 짜증 낼 땐 은근히 스피드가 빠르시다. 저 말을 전부 내뱉는데 대충 15초도 안 걸린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선의로 건넨 말에 고구마 잔소리를 한가득 얻어먹다 보니 살짝 열이 받았다.
"저기요. 사장님. 근데 초짜 주제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이런 말 직장 내 갑질이나 힘희롱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만."
노인의 눈이 희번덕 거리면서 눈동자가 여기저기로 왔다 갔다 한다. 이런 식으로 받아칠 줄은 몰랐는지 조금은 현타를 먹은 표정이다. 난 마음속으로 '예에쓰,,,'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서?"
그래서 딱히 뭘 할 건 없다만. 말과 행동.. 아니 생각과 말은 다를 수 있는 법. 노인의 표정은 그래서 어쩔 건데.. 였다. 이대로 물러서긴 모양새가 좀 그렇다.
"개선이 안 되면 노동부에 신고할 수도 있어요."
"누가 신고받아준대?"
"아니, 노동부 가서 얘기하면 보통은 사장 편이 아니고 직원 편이라던데요."
"자네가 직원인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인데, 듣고 보니. 알바는 직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의미 없고.
"알바도 직원 아닌가요?"
"근로계약서 있나?"
끄응. 알바한테 계약서가 어딨어. 내가 딱히 대답을 못하고 눈만 뻐끔거리자 여 노인은 이제 상황종료라고 판단했는지.
"난 자네를 직원이 아니라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네. 자. 이리 와서 앉게나."
또 그 선한 목회자의 표정을 짓고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려고 한다. 노인은 나한테 앉으라 해 놓고서는 카페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간이칠판을 테이블 옆으로 끌어왔다.
"사장이 이런 거 직접 하면 갑질은 아닌 거지?"
말은 그리 했어도 은근 신경이 좀 쓰였나 보다.
"근데요. 저 이제 대학원 진학하는데 아무 데나 가서 누구 제자라고 하면 안 되거든요. 지도교수님도 따로 계시고요. 특히나 이런 점집에서 제자가.."
"아이고. 아이고. 나 원 참.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알았네. 이 사람아. 괘념치 말게."
그동안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받침대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여 노인은 물티슈를 꺼내 받침대를 천천히 닦으면서 말했다.
"자네. 경우의 수가 뭔지는 알지?"
이후 여 노인은 무려 30분 동안이나 입에서 침을 튀기며 주역점을 칠 때 동전을 던지는 방식의 과학적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나의 짧은 문장력으로 그 가열찼던 분위기를 그대로 옮기기엔 역부족이라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이 칠판에 그린 그림은 이런 것이었다.
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한꺼번에 던지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4가 된다. 동전 셋 모두 앞이나 뒤가 나오는 경우가 있고, 둘은 뒤 나머지 하나는 앞. 둘은 앞 나머지 하나는 뒤, 이렇게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칠판에 그린 도식은 양으로 보는 경우를 정리한 것이다. 음의 케이스는 저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노동법 잘 아는 우리 똑똑한 알바생 제자야. 이제부터 사부가 큐비트를 직접 시전해 볼 테니. 잘 보도록."
에고 이 어르신 아직 기분 덜 풀리셨네. 근데 난 자기 제자 아니라니깐.
"양이냐 음이냐만 판단하려면 동전을 세 개씩 던질 필요가 없지. 하나만 던져도 앞이나 뒤가 명확하게 나오니까 말이야."
"네이, 옳으신 말씀. 명쾌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칠판처럼 말이야. 동전 셋을 던지면, 셋 다 앞이 나오는 경우가 있고, 하나만 앞이 나오는 경우가 있겠지. 이 두 놈을 모두 양으로 보는 거야. 숫자로 하면 1이지."
"당근입져. 이건 그냥 그렇게 보는거니까 논란의 여지가 없네요."
"그런데 셋 다 앞면이 나온 이거 말이야."
노인은 칠판에 그린 두 줄 중에 윗 줄을 보드펜으로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주역하는 사람들은 음과 양이 계속 순환하면서 변한다고 생각하거든. 주역의 역이 한자로 易 이렇게 쓰는데 이건 바뀔 역자야."
"계속 순환하면서 바뀐다? 무슨 얘긴지는 알겠는데. 근데 세상 일이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 않나요?"
"자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다 순환해."
"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이제 슬슬 억지논리로 들어가시네요."
"파동이 뭔지 제대로 알면 그런 소리는 못하지."
여 노인은 잠깐 뒷짐을 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어쨌건 셋 다 앞면이 나온 걸 노양이라고 부른다네. 이 노양은 겉으로 보면 1이지만 조만간 0으로 바뀔 것이란 말이지. 이렇게 동전 세 개를 던지는 간단한 방식으로 노양과 소양을 구분하는 동시에 노양에 있어서는 양과 음을 중첩시켜 놨으니 이걸 놓고 큐비트와 다를 바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제자는 이 심오한 이치를 잘 이해하겠느냐?"
"흐익, 제가 어찌.."
사실 하나만 던져도 될 동전을 셋이나 던지는 이유는 이해했다. 칠판에 그려 놓은 두 가지 경우의 수는 둘 다 똑같은 양이다. 하지만 아랫 줄의 소양은 당분간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양이고, 윗줄의 노양은 지금 현재만 놓고 보면 양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변화가 발생하면 곧 음이 되어버릴 양이다. 여 노인 얘기의 핵심은 '조만간 변화가 발생하면' 바로 이 대목에 점을 치는 포인트가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 점 보러 오는 사람은 조만간 무슨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서 오는 것 아닌가. 대충 들어보면 여 노인의 얘기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덮어놓고 여 노인의 말에 동의하기엔 자존심도 그렇고. 그리고 다 떠나서 점쟁이가 큐비트 어쩌고 하는 얘기를, 명색이 원효대 대학원생이 아이고 오늘 진리의 말씀 잘 경청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지 않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집어넣으면 용량 초과되니까 오늘은 이 정도만 함세. 제자는 돌아가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내일은 야근이네. 밤손님이 한 명 찾아온다 하니."
이 영감님 꽤나 진지하게 조선시대 말투를 계속 쓰는 것을 보니 진짜 오락가락하시는 건가 싶었지만, 워낙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딱히 한마디 하지를 않으니 점점 더 증상이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 그날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퇴근했다.
카페를 나와 터벅터벅 걷다 보니 진짜 호기심이 잔뜩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여 노인의 얘기를 덥석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지 내 머릿속에는 딱히 반론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진짜 여 노인 얘기가 사실이라면 이거 큰일 아닌가. 양자컴퓨터의 핵심이 주역점이라니.. 이건 좀 곤란한 일이다.
난 가끔 머리가 아플 땐 동아리방을 찾는다. 나는 클래식기타연구회 왕고참 선배이고, 아까 지나쳤던 하은설은 물리학과 2학년 생으로 같은 동아리 회원이다. 동아리방은 학생회관 제일 위층 끝방이다. 클래식 기타라서 소음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조심을 해야 되니 방배정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래, 한 곡 뜯으면서 머리나 좀 식히자.'
별생각 없이 동아리방에 올라갔더니 후배들 몇 명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중에는 하은설도 있었다.
"야. 써리, 너 아까 거기 왜 갔었어. 내 급한 연락이 와서 인사도 못 했네."
써리는 동아리에서 하은설을 부르는 별명이다.
"아, 차니 선배! 그게 아니고.."
내 이름은 김이찬이지만 동아리에서는 차니라고 부른다. 써리나 다른 사람들 모두 나를 차니 선배라고 부르는데, 갑자기 아까는 써리가 나를 이찬 선배라 불렀던 것이 떠올랐다. 흐음. 이거 이거 좀 수상한데.
"엄마가.."
"아. 집에 뭔 일 있어서 갔구나. 난 또."
나는 진짜 그런 줄 알고 관심을 껐다. 하지만 난 몰랐다. 젊은 여대생들이 점집을 가는 이유는 거의 대부분 하나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하나에 집안일은 포함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에 있던 써리 동기들은 눈치를 챈 표정이었다. 다들 입맛을 쓰읍 다시면서 내가 나가기만 하면 바로 써리를 물어뜯을 태세였다.
그런데 갑자니 써리가 물리학과 2학년 생이라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참. 써리 너 물리학과 맞지?"
"그거 몰랐어요? 선배?"
"야야야. 잘 됐다. 아오 내가 오늘 큐비트 때문에 욕먹은 거 생각하니까 갑자기 또 열불이 차 오르네. 너 시간 괜찮니? 나랑 잠깐 공부 얘기 좀 해."
"지금요?"
"웅."
"그럼 어디서... 제가 잘 아는 카페.."
"아니 저기 복도에 자리 많잖아."
우리 동아리는 개인연습을 할 공간이 따로 없다 보니 동아리방 바깥 복도에 강의용 의자를 여러 개 갖다 놓고 아무나 자유롭게 기타 연습을 하곤 했다. 자리는 항상 많다. 그런데 쟤는 웬 카페?
나는 여 노인에게서 들었던 동전 던지기와 큐비트 논란을 써리에게 홀라당 다 쏟아부었다. 얘기하는 도중 써리는 군데군데 '우와 우와'하면서 탄성을 터뜨렸다.
"근데 차니 선배! 거기서 알바 하셨어요?"
"아니 며칠 안 됐어. 방학때만 하려고. 용돈은 벌어야 되니까."
"선배는 점칠 줄도 모를 텐데 알바하기 어렵지 않아요?"
"점은 알바가 안 치지. 점쟁이가 쳐야지."
"아. 그럼 알바는 점칠 줄 몰라도 되는 거네요?"
"당연하지. 나도 하는데 뭐."
"저도 용돈 벌어야 되는데.. 거기 알바 한 명 더.."
사실 써리는 물리학과 수석 입학생이었다. 써리는 내가 가졌던 의문을 몽땅 해결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친구였다. 써리는 양자의 중첩가능성과 불확실성 두 가지 관점에서 여 노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노양과 노음은 큐비트처럼 수학적 연산이 아닌 단순한 시간경과에 따른 변화만을 가정한다는 점, 그리고 큐비트는 무작위 랜덤방식으로 상태를 측정하지만 노양 노음은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배정된다는 점에서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고 일목요연하게 답해 주었다. 난 입이 떠억 벌어졌다.
"써리!"
나는 놀라움에 가득 찬 강렬한 눈빛으로 써리를 터프하게 응시했다. 두 손으로 써리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네, 차니 선배!"
써리도 두손을 모아 쥔 채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
아무도 없는 학생회관 복도에 겨울 바람이 뭔가 궁금한 듯 스쳐 지난다.
"너 나랑 같이 영감한테 가서, 지금 했던 얘기 한 번만 더 해 줘라. 내가 커피 쏠게."
난 써리의 당찬 반론에 영감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고, 써리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더니 카페 검색을 시작했다.
(5화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이 글은 작자의 상상을 펼친 허구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조직, 각종 사건 등의 소재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