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모스 프리퀄
그린슬리브즈
나는 써리의 오후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숨죽인 고양이 마냥 시간을 기다렸다. 써리는 영감의 궤변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비장의 한 수였다. 오늘 저녁 써리를 기용해서 반드시 여 노인의 콧대를 꺾어놓을 테다. 나는 써리에게 강의 끝나는 대로 정문 앞 분식집에서 보자고 톡을 날렸다.
"아이고 귀여운 녀석. 그래. 써리야. 차린 건 오떡순 밖에 없지만 그래도 든든히 먹어둬라. 오늘은 저녁때 일 좀 해야 되니까."
"차니 선배. 그런데 그 사주카페 할아버지가 그렇게 대단해요? 선배가 이 정도로 허둥지둥하는 건 첨 봐요."
"허허. 이 사람 보게. 허둥지둥이라니.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그러는 거지. 그 영감 진짜 보통이 아니란 말이야."
영감한테 욕먹으면서 탈탈 털렸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찔하다. 어제 동아리방에서 써리에게 상황설명을 충분히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될까 싶어, 나는 다시 한번 여노인에 대해, 동전 던지기에 대해, 그리고 큐비트에 대해 장광설을 풀었다.
"알았어요. 선배가 까라면 까야죠 뭐."
에구. 까긴 뭘 까냐. 넌 그냥 우직하게 돌직구만 던지면 된단다. 자근자근 밟아주는 건 내가 할 테니...
그래도 나는 써리가 몹시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랍시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있는데 토달지 않고 다 받아주니 고마운 건 맞다. 우리는 작전구상을 마친 후 의기투합해서 분식집을 나섰다. 이제 대어를 낚을 차례다.
카페엔 라디오가 켜져 있었고 여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영감의 고풍스러운 라디오는 항상 고전음악 채널에 맞춰져 있다. 우연찮게 클래식 기타 음악 한 곡이 흘러나왔다. 영국 전통민요인 그린슬리브즈 Greensleeves. 이건 솔로나 듀엣 아무렇게나 연주할 수 있는 쉬운 곡이다.
"어 선배. 이거 이거 그린슬리브즈!!"
"에구 뭘 그리 촐싹거리냐.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닌데."
"저한텐 너무 중요한 곡이에요."
"응? 왜?"
"이거 작년 정기연주회 때 선배랑 나랑.."
써리가 얘기하는 걸 듣다 보니 불현듯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우리 동아리는 1년에 한 번씩 정기연주회를 한다. 관객이라 해 봤자 학교 친구들과 부모님들 뿐이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이 관객 앞에서 연주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그때 신입생들에게는 선배 한 명을 붙여서 듀엣곡을 연주하도록 한다. 당시 써리의 파트너가 바로 나였다.
완전 다 까먹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네. 흐음. 그런데 얘 표정 봐라. 써리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흐뭇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거 안 된다. 분위기 말랑말랑 해 지면 곤란하다. 우리 써리 벌써 전투의욕 상실한 거 아냐.
"어이. 써리! 이 영감 보통 아니라니깐. 정신줄 놓으면 안 돼."
나는 살짝 써리의 어깨를 툭 건드리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클클. 영감이 어쨌다구?"
공교롭게도 바로 그 찰나. 여 노인이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내실에서 걸어 나왔다. 에구머니나.
"아뇨 아뇨. 어르신. 오다가 이상한 할아버지가 지나가길래.. 에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최선을 다해 상황을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일단 어물쩍 넘어가야 된다.
"그리고 오늘 후배 한 명 데리고 왔어요. 여기 써리라고."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 어제도 왔었는데."
"오오. 내 기억하고 말고. 어제 타로점 보고 갔던 그 아가씨로군."
갑자기 여 노인의 얼굴이 귀여운 친손녀 보듯 활짝 펴졌다. 사람 표정이 어찌 저래 한 방에 달라질 수 있을까.
"네. 몰랐는데. 여기 카페에서 우리 차니 선배가 알바 뛰고 있더라고요."
"아. 저 녀석. 원래는 알바였는데 내가 제자로 받았지."
"아니 어르신. 제가 언제 제자 한다고 했어요. 나 원 참. 써리야. 이거 다 뻥이다 뻥."
"네에? 제자요? 혹시 그럼 알바 자리는 하나 빈 건가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이쿠. 우리 똘똘한 아가씨가 알바 하겠다구? 암 가능하지!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가능해."
"아니 아니. 잠시만요. 여기 알바는 제가 맡아서 임무수행 중이고요. 추가로 알바를 한 명 더 쓰시려면 새로 공고를 내시고, 지원을 받으셔야죠. 저 때는 자격도 까다로웠고 심사도 깐깐하게 하셨잖아요."
"심사? 안 했는데. 대충 봤어. 그날 점괘가 좋았거든. 지원 들어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받으라는 점괘가 나와서 말이야. 자넨 무심사 통과였지. 제대로 봤으면 아마 쉽지 않았을 걸."
"우와.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오실 겁니까?"
티격태격하는 순간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어제 얘한테 큐비트 얘길 했었거든요. 어르신께서 알려주신 거 있잖아요. 근데 얘가 그게 완전 잘못된 얘기라고 하더라고요. 얜 물리학 전공이라 양자역학 되게 잘 알거든요. 얘기 한번 들어보시고 채용 여부는 검증 후에 판단하시면 어떨까 사료되옵니다."
자 이제 치고 들어갈 때다.
"호오. 내가 틀렸다라.. 완벽한 사람은 없지. 뭐 어쨌거나 얘기나 한번 들어보세."
나의 동전은 어느 계에 존재하나?
자연스럽게 써리의 PT가 성사되었다. 여전히 노인은 써리를 쳐다보며 싱글벙글. 나도 활짝 웃는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곧 탈탈 털리실 겁니다. 써리 역시 나와 노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방긋 웃었다. 태풍의 눈 한가운데. 폭풍전야란 바로 이런 것.
"허허."
"하하."
"호호."
나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칠판을 끌고 나왔다. 비장한 심정으로 받침대를 닦고 보드펜을 새 걸로 교체했다. 지우개도 제자리에 정돈하고. 자 써리야. 이제 돌직구 한 번 쎄게 던져보자꾸나.
"그래 아가씨가 생각하는 양자의 세계에 대해 한번 얘기해 주겠나. 내 잘 들어봄세."
써리의 즉석 PT는 정말 대단했다. 여 노인도 나도 무릎을 치며 이야기에 쏙 빠져 들었다. 적당한 하이 톤의 목소리와 표정, 청중을 향한 아이컨택, 간결한 판서, 중간중간에 적절한 제스처까지 전문 PT 강사로 나서도 될 법한 놀라운 스킬이었다.
"주역점에서 동전 세 개가 모두 앞면(☰, 노양)이 나오면 이는 명목상 "1"이지만, 미래에 "0"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어요. 이 대목은 마치 큐비트가 양자 브라켓 |0⟩와 |1⟩의 중첩 상태에 있다가 관찰자가 비로소 측정이라는 행위를 할 때 하나의 값으로 수렴하는 것과 아주 닮았지요.“
물 흐르듯 막힘없는 논리.
"노양은 현재 상태가 확정적이지 않고, 추후 반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거든요. 때문에 큐비트가 고전적 비트처럼 0과 1의 확정된 값을 갖지 않고, 관측되기 전까지는 0과 1의 두 가지 상태를 동시에 가진다는 점과 쉽게 연결이 되죠.”
"얼쑤!"
여 노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웬 얼쑤? 소싯적에 풍물패도 하셨나..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도 있어요. 큐비트는 양자역학의 수리적 원칙에 따라 그 상태가 복소수 확률진폭을 통해 결정되거든요. 이게 좀 어렵지만 사실 별거는 아닌데. 양자 상태 |ψ⟩ = α|0⟩ + β|1⟩에서 α², β²은 각각 0과 1이 될 확률이죠. 두 개 더하면 1이예요. 반면, 주역의 노양과 노음은 이런 수학적 연산 구조가 아니라 단지 시간 경과에 따른 변화 가능성만을 따져요. 즉 양자는 양쪽으로 변화할 수 있는데 비해 노양 노음은 시간 방향으로 직진만 한다는 얘기죠.“
"잘 이해했군."
여 노인은 자기를 까는 얘기에도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흠.. 기분이 슬슬 나쁠 때가 되어 가는데. PT는 종반전으로 치닫는다. 아직 여 노인에게 별다른 타격감이 없다는 것이 어째 좀 불안하다. 이제 마지막 승부처.
"그리고 큐비트는 측정 시 무작위성을 따르지만, 주역점의 변화(노양→음, 노음→양)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결정되죠. 즉, 큐비트의 결과는 확률적이지만, 주역은 그 상징체계 안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큐비트는 양자 얽힘과 같은 복합적인 상태를 구현하면서 다차원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데 비해, 주역점의 각 효(爻)는 상호 독립입니다."
PT가 끝났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짜악- 짜악- 짜악-
예상과 달리 여 노인은 손뼉을 쳤다. 격하지 않게 1초에 한 번씩 천천히 치는 그런 손뼉이다.
"결론적으로 사장님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
"허허. 그것 참. 젊은 재능이로다. 나라의 미래가 밝아."
"헤헤. 그렇죠? 어르신. 이 친구가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뎁쇼. 진짜 똑똑한 친구예요. 입학할 때 과 수석도 했고요."
노인의 표정이 살짝 변하기 시작했다. 다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당황하지 않고 있다.
"자, 이제 질의응답 해야지. 거기 둘 다 앉아보게나."
이상하게도 써리와 나는 마치 판사 앞에 선 죄인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하게 자리에 앉았다. 이 양반을 상대하다 보면 자동으로 그리 된다.
"자, 간단한 질의응답 진행할 테니. 망설이지 말고 3초 내에 단답식으로 대답하게."
"엣썰."
"전자가 사는 곳은 거시계냐 미시계냐?"
"미시계!"
"우리가 사는 곳은 거시계냐 미시계냐?"
"거시계!"
"써리가 얘기한 양자의 특징들은 거시계에서 작동하냐 미시계에서 작동하냐?"
"미시계!"
"내 동전은 미시계에 존재하냐 거시계에 존재하냐?"
"거시계!"
"거시계의 내 동전이 미시계의 양자 법칙을 따를 방법이 있냐 없냐?"
순간 나와 써리는 얼음이 되었다.
"... 없네요. 끄응"
노인에게 한방 먹고 나가떨어지는데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대신에 채용은 시켜주마. 지금부터 일 보게. 자네는 신참 교육 좀 잘 시키고."
여 노인의 표정은 여전히 흐뭇했다. 싫지 않은 눈치다. 하지만 써리와 나는 갸우뚱갸우뚱하면서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게 진짜 우리가 진 게 맞나?
"야 써리야. 내 얘기했잖아. 저 양반 말발이 보통 아니라고. 우와 진짜 어이없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오늘부로 오라클 길드를 창설하겠다
"너희들 잘 듣거라. 내가 어제오늘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노인은 세상 일의 흐름과 사람의 일생은 어마어마한 불확실성에 노출된 복잡계 현상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나 복잡계의 불확실성이 양자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데 비해, 고대 그리스 이후 서양학의 전통은 기계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뉴턴과 데카르트식의 방법론들 뿐이라, 소립자 세계의 예측불가한 불확실성을 다루는데 매우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에 비해 동양학은 근거없는 미신으로 치부되고 있었지만 주역이나 명리학은 아원자 단위의 특성을 변칙적으로나마 현실에 잘 버무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음지에서 나와 양지에서 제대로 연구되어야 할 분야라고 했다.
"여튼 사기꾼들이 문제야. 쯧쯧. 점은 불확실성 하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한 시뮬레이션 같은 것일 뿐이야. 절대로 미래를 확정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어. 할 수 있다고 떠드는 말들 그거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돼. 백날 관측해 봐라 전자의 위치를 확실하게 찝어낼 수 있는지. 그런 건 그저 확률일 뿐이라고 그렇게나 얘기를 해도 미련을 못 버리네. 하긴 다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그렇긴 한데."
이 말을 할 때 여 노인은 약간 울컥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써리까지 영입되었으니.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학파를 하나 창설하도록 하겠다. 오랫동안 이 날을 기다렸는데 감회가 새롭구나."
"학파라굽쇼?"
"이제 우리는 점(오라클 oracle)을 통해 불확실성의 복잡계를 연구하는 오라클 길드다. 나는 장문인, 차니는 1대 제자, 써리는 2대 제자다. 너희들끼리는 사형 사매라고 부르도록 해라. 나는 사부나 장문인으로 부르면 된다."
"길드 마스터 길마 아니고요?"
"한글 좀 애용하자. 녀석아. 그리고 좀 성격 더러운 사숙이 한 녀석 있는데 며칠 내로 소개해 주마."
그때 갑자기 써리가 나섰다.
"저기 사부님. 혹시 우리 이거 종교단체는 아닌 거죠?"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게냐."
"그게 혹시 나중에 결혼도 못하고 뭐 그런 거 아닌가 해서요."
"..."
"..."
그때 출입문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 받아라. 오늘은 사주를 좀 봐야겠군."
(6화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이 글은 작자의 상상을 펼친 허구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조직, 각종 사건 등의 소재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