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모스 프리퀄
의뢰인 마일강
"손님 받아라."
누군가 찾아오면 늘 들리는 딸랑이 소리와 함께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 신사가 카페에 들어섰다. 창밖에는 신사를 태우고 온 것 같은 검은색 대형세단이 멈춰 서 있었다.
'우와 저런 아저씨들도 이런델 오는구나. 사형.'
써리가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녀석은 사형이라는 말이 어색하지도 않은가 보다.
'웅, 저런 사람들이 복채를 두둑이 낸다고 하더라고. 오늘 드디어 한번 보겠군. 얼마나 내려나. 대박 나면 사부님이 제자들한테 보너스라도 좀 주셔야 될 텐데.'
신사는 고급 이태리산 원단으로 만든 수제 양복을 입었다. 정장도 타이도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신사 패션의 완성은 그런 것들 뿐만이 아니다. 자칫 놓치기 쉬운 핵심 코드는 바로 구두와 헤어다. 제 아무리 멋진 수트를 걸쳤더라도 구두에 흙이 묻었다거나 머리가 지저분하면, 최악의 경우 양복 어깨쯤에 비듬이 떨어져 있다거나 그러면 몽땅 꽝이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챙겨야 할 모든 것을 다 챙겼다.
"혹시 여기가 청춘.."
"그래 여기가 청춘사주카페 맞다네. 자, 이리 와서 앉으시게. 거기 메모지에 인적사항 좀 써 주시고."
여 노인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손짓을 하며 착석을 권했다. 저 미소는 분명 고객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오늘 복채에 대한 기대 때문이리라. 그러면서도 매의 눈으로 유심히 신사를 이모저모 훑어본다. 마치 그가 발출 하는 모든 무형의 정보들을 캐치하겠다는 의도인 것 같다.
메모를 마친 신사가 종이를 건네며 물었다.
"도사님!"
도사? 큭큭큭큭. 나와 써리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입을 가린 채 큭큭거렸다. 이런 신박한 호칭이 있었군. 난 왜 저 단어를 생각지 못했을까.
"익히 말씀 들었습니다. 엄청 잘 맞추신다고."
"쓸데없는 소리. 괜히 천기누설하지 말고. 흐음. 그런데 직업이 무직? 무직인데 그렇게 차려입고 왔나? 마일강 씨"
여 노인의 질문에 마일강이라 불린 신사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제가 갖고 있던 회사를 얼마 전에 매각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무직이라는 얘기죠. 뭐 사실 백수가 맞고요. 오늘은 매수자 쪽 하고 후속 미팅이 있는 날이라 정장을 입은 겁니다."
"뭐 그런 건 상관없고. 회사를 팔았다.. 그렇군."
여 노인은 메모지를 보면서 양손가락을 이리저리 꼽았다. 메모지에 뭔가를 끄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신가? 신사양반."
"제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네요."
"앞으로 뭘 해야 될지를 모르겠다.. 그럼 지금까지는 뭘 했었나?"
"기업체 운영했죠."
"업종은?"
"바이오 신약개발하는 벤처기업입니다."
"흐음 어디서 좀 들어본 것 같은데.. 회사 이름이?"
"작은 벤처라 잘 모르실 텐데, 사명은 콴테라 Quanthera입니다."
콴테라.. 흐억! 이건 도민기의 회사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나이?"
"55세입니다."
"주소?"
"강남구 학동로.."
"잠시만요. 사부님!"
갑자기 써리가 여 노인에게 다가가서 귓속말을 했다. 자기 딴에는 속삭인다고 한 건데 다 들린다. 마일강도 들었을 것이다.
'사부님. 너무 형사가 피의자 심문하는 분위기인데요. 그래도 고객이신데 예의와 품격을..'
'시꺼. 이 녀석아. 나의 루틴이라는 게 있느니라.'
여 노인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지금 처음 듣는다. 나름 잘 속삭인다. 그런데 써리는 형사 앞에 가 봤나. 저런 걸 어떻게 알지? 나도 모르는데.
'사형한테 들어보니 복채가..'
’덱. 저 놈이 또 쓸데없는 소릴 했구나. 제자는 물러서라. 돈에 연연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써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얘는 의사결정이 빠릿빠릿하다.
"아 네네. 알겠습니다. 상담 계속하시죠. 그리고 뭐 음료라도 좀 내 올까요?"
써리가 양쪽으로 바라보며 방실방실 예의 그 미소를 날리니 싸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훈훈해졌다. 이제 보니 쟤는 저 미소를 무기로 써먹네. 언제 한 번 나도 해 봐야겠다.
"허허, 그래 자네도 커피 한 잔 들게나."
"저야 뭐. 주시면 좋죠. 따아. 한 잔 부탁드릴게요."
"따아 2"
여 노인도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따아 3'
나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써리는 탕비실로 들어갔고 상담이 재개되었다. 사연은 구구절절했다. 자기 어릴 때 꿈부터 해서 대학 때 연애했던 얘기까지 다 나왔다. 하지만 핵심은 회사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짜증 나서 분노의 창업을 했고, 회사가 망하기 직전에 운 좋게도 유럽계 사모펀드에 매각했다는 얘기였다.
"매각 못했으면 빚쟁이들한테 쫓겨 다닐 신세였군."
"그렇죠. 막판에 걔네들이 나타날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솔직히 운이 좋았죠."
"그래서 앞으로 뭘 하려고?"
"여러 가지 생각 중입니다. 다른 벤처회사를 새로 만들어서 사업을 일으켜 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 나이도 있으니 거꾸로 이제 제가 벤처투자자로 나설까 싶기도 하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공기 좋은 데서 전원생활이나 할까 하는 생각도 있는데. 뭘 어찌해야 될지 딱히 모르겠네요."
나는 그때부터 사부의 표정이 미세하게 조금씩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진도 나가면 호통 소리 한번 나올 것 같다.
"참, 자네 매각대금은 얼마나 챙겼나?"
"뭐 세금 떼고 이리저리 해서 현금 손에 쥔 게 한 2천억 정도 됩니다."
끼룩끼룩. 나와 써리는 다시 한번 서로 마주 보며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오늘 복채 대박 예상!! 역시 빅딜의 맛은 달콤하다.
"에라이. 정신없는 친구야. 뭐라? 또 새로 사업을 해? 다른 벤처에 투자를 해? 제정신인가?"
예고된 여 노인의 호통이 마일강을 직격 했다. 흐아. 고객한테 저래도 되나.
"눼에? 도사님 갑자기.."
"망할 뻔한 회사 완전 재수로 매각해서 거액 현금 손에 쥐었으면, 그냥 한번 죽었다 살아났다 생각하고 하늘에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누굴 또 죽이려고 회사를 차려. 자네 회사 망하면 자네 혼자 망하는 걸로 끝나는 줄 아나. 자네 직원들은 하루 아침에 다들 실업자 되는 거야. 걔네들도 다 가정이 있어. 당신 경영능력 부족해서 사업실패한 게 만천하에 증명됐는데. 뭬야. 또 회사를 차린다. 다른 벤처에 투자한다.. 이게이게 제정신이냐고오! 이 사람아. 어이쿠 머리야."
여 노인은 일갈을 하면서 오른 손으로 뒤통수까지 짚는다. 약간 오버하시는게 저거 혹시 연기 아닌가 싶은 의혹이 잠시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정작 마일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여 노인이 목소리를 낮춘 뒤 말을 이었다.
"자네는 말이야. 결과적으로 현금을 손에 쥐었지만 그게 재수라는 걸 잘 알고 있어. 정작 사업은 다 말아먹었는데 말이지. 제대로 한번 꺾인거야 이건. 하지만 본인은 억울해. 나도 잘할 수 있었는데.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뭐 이런 생각이 머리에 꽉 차 있겠지. 그러니까 새로 회사를 차리네, 다른 회사에 투자하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마일강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동그래졌다. 좀 촉촉해 보이기도 한다.
"크으. 도사님. 그걸 어떻게.. 제 속마음을 완전 다 맞추시네요. 여윽시 여윽시 용하십니다. 우와 진짜 대단하시네."
마일강은 얘기하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갑자기 우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써리와 나는 고개를 아래위로 격하게 흔들어 주는 것으로 리액션을 대신했다.
써리가 다시 내게 속삭였다.
'오늘 복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형.'
얘는 겉으로는 안 그래 보이는데 진짜 돈에 관심이 많네.
"사실 나도 이해는 된다네. 갑자기 큰돈 손에 쥐니까 얼떨떨하기도 하고 좀 무섭기도 하고 그럴 거야. 돈 없을 땐 그런 걸 느끼지 못하지. 겪어봐야 알아. 어렵게 얻은 돈 다시 다 날려버릴까 걱정도 될 거고. 주변에 혹시 누가 내 돈을 노릴까 의심되기도 하고. 내가 이 돈으로 뭔가 잘못된 일을 하거나 인생이 오히려 더 망가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겠지."
마일강은 이제 아예 입을 떠억 벌린 채로 앉아있다.
"네네. 맞습니다. 도사님. 다 맞아요. 그러니 제가 앞으로 어찌해야 될지를.. 제가 좀 힘이 드네요."
공부하라는 건 자네 사주가 정인격(正印格)이기 때문일세
"공부하게."
"공부요?"
사부가 저리 나올 땐 누구나 눈만 껌벅거리게 된다. 생뚱맞게 웬 공부? 진짜 어이없고 맥락없다.
"자넨 공부가 맞아. 소싯적에 공부 좀 하지 않았나?"
"흠흠. 제가 돈장사를 못해서 그렇지 공부는 그래도 좀.. 했죠."
"곧 육십 바라보는 나이에 시험공부할 건가. 그런 공부 말고 진짜 공부를 해 보라고 앞으로 말이야."
"진짜 공부요?"
"자네 예전부터 뭔가 공부하고 싶은 게 하나쯤 있었을 텐데. 취업용으로 준비한 거 말고. 순수 호기심으로 말이야. 얘기해 봐. 여기서는 무슨 말이라도 다 괜찮아."
마일강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사실 저는 마음 한 구석에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죠. 어릴 때 부모님께 얘길 못 꺼내서 그렇지만."
"그렇지 그렇지. 바로 그런 거지. 앞으로 그거 해. 신학! 좋네. 상담 끝."
"진짜요? 우와. 제가 신학을 공부한다고요? 이 방향이 맞다고요! 이야 진짜 이거."
마일강은 잠시 흥분한 듯했다. 하지만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그런데 도사님. 용하시긴 한데요. 근데 점은 안 치시나요? 오늘 점치시는 걸 본 적이.."
"크헉. 점을 쳤냐고?"
갑작스러운 마일강의 기습질문에 여 노인이 당황했다.
"점 안 쳤었나?“
고개까지 갸우뚱갸우뚱거린다. 사실 사부는 치매가 올 나이가 이미 지났다.
"아니지 아니지 점 쳤었지. 아까 나한테 메모지 줬잖아. 그걸로 점 쳤어. 손가락 꼼지락거리는 거 못 봤어? 그게 사주 본 거야. 여보쇼.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점도 안 치고 날로 먹는 사람 아닐세."
"아하. 점 치셨구나."
마일강과 나, 써리 셋이 모두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복채 이상무.'
써리가 나에게 또 속삭였다.
"자네 사주는 말이야. 정인격으로 나오는데. 지금 자네 상황이라면 이건 공부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야. 자네를 대표하는 오행이 목(木)이거든. 이건 자네 생일 날짜로 짚어 보는 거야. 그런데 태어난 월은 또 늦가을 해(亥) 월이야. 이건 오행으로 치면 수(水)에 해당되네. 그래서 그 둘은 1차적으로는 수생목 상생관계, 2차적으로는 정인격(正印格)이라고 보는 거야. 더 세세하게 들어가야 되는데 그건 설명해 줘도 아직은 이해하기 힘들어. 그러니까 그냥 정답만 외우게. 공! 부!"
"아 네.. 잘은 모르겠지만 점쳐서 나온 게 정인격인데, 그게 공부하란 뜻이란 말씀이네요."
"잘 이해했네. 자넨 59세 이후 10년 대운에 수(水)가 또 들어와. 더 가열차게 공부하면 되는데. 그때쯤 한번 더 찾아오게. 내 다른 걸 또 일러줄 테니. 그동안 신학 공부 열심히 하고. 그리고 말이야. 자넨 처음부터 공부 쪽을 나갔으면 지금쯤 대학교수 자리 하나 꿰어차고 있었을 거야. 괜히 사업해 가지고 말이야. 그래도 다행으로 알아. 돈 대박 났잖아.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
여 노인은 신학 공부하라면서 또 점치러 오라고 했다. 참 자유분방한 분이시다. 이제 상담을 슬슬 마무리하려는 찰나. 여 노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참 하나 물어보겠네. 매각한 자네 회사는 원래 뭐 하는 회사였나?"
"아. 저희요. 저희는 원래 항암제 신약 후보물질 개발하는 회사인데, 그걸 그냥 하는 게 아니고 양자컴퓨터로 분자 구조 시뮬레이션해서 하는 뭐 그런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자컴퓨터가 상용화가 안되다 보니 매출이 안 나오고 해서 버티지를 못한 거죠."
"오케이. 뭐 그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자네 말대로 그렇게 맛이 간 벤처회사를 누가 인수했을까? 누가 왜?"
"아.. 걔네는 유럽계 벤처펀드였어요.. 저도 잘 모르는 애들인데. 사겠다고 하니 저야 땡큐죠."
"걔네들 이름이 뭔가?"
"앙시 비전펀드 Ensi Vision Fund인데 프랑스 쪽이라고 하더라고요."
앙시라는 말을 들은 여 노인이 잠시 짧은 침묵에 빠졌다.
"앙시.. 후후. 자네 혹시 걔네들이 다 망한 회사를 뜬금없이 왜 샀는지 짐작할 수 있겠나?"
"저야 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입장이라. 사실 저도 그게 궁금하긴 했는데 괜한 소리 했다가 딜 틀어지면 저만 손해니까 입도 뻥긋 안 했죠. 저희 회사 꽝인데 이거 왜 사요?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잖습니까?"
"걔네들 절대로 아무거나 안 사. 자네 회사를 샀다는 것은.."
내가 보기엔 여 노인은 앙시라는 이름을 듣고 살짝 심적으로 흥분한 듯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인은 거기에 대해서 일단 입을 닫았다. 앙시.. 훗날 우리 오라클 길드와 더불어 강호 9대 문파의 한 축이 되는 앙시마인드 EnsiMind 그룹. 나는 이 날 그 이름과 스쳐 지나가듯 조우했다.
마일강은 앞으로 신학공부 열심히 하겠다며 연신 굽신굽신 하면서 돌아갔다. 써리는 끝까지 복채 금액이 궁금했던지 마일강에게 대놓고 결제 언제 할 거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으나 마일강은 써리처럼 방긋 미소만 지을 뿐 즉답은 피했다.
"제자들은 듣거라. 큐비트는 얼마 전에 한번 다뤘으니 이제 사주 공부를 해야겠지. 내일 저녁에 사주 수련 들어간다."
"네. 사부님. 제자들 시간 맞춰.."
"이번엔 예습을 좀 빡세게 해야 돼. 벡터 Vector와 스칼라 Scalar의 철학적 의미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게. 그리고 요즘 너네들 학계에서 떠드는 2차 텐서 Tensor 들에 대해서는 좀 꼼꼼히 알아보고 오도록. 사주는 한자가 아닌 텐서로 표현할 수 있다네. 그걸 배워야 돼."
끄응. 이 양반 이번에는 수학인가 보다. 그러면 내 담당인데..
(7화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이 글은 작자의 상상을 펼친 허구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조직, 각종 사건 등의 소재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