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모스 프리퀄
연말에 알바 생활 시작하고 며칠 출근하는 동안 해가 바뀌었다. 이제 2035년 을묘년이다. 써리는 계절학기로 여전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조기졸업이 확정된 나는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사부는 손님 예약이 없는 저녁시간을 활용해서 사주팔자 수련을 하자더니, 이건 잠깐 공부해서 될 일이 아니라며 아예 우리를 데리고 워크샵을 가겠단다. 오늘은 마침 써리의 수업이 없는 날. 오라클 길드 최초의 워크샵이 개최되었다.
동지섣달 북풍이 매서운 날이었다.
페룬과의 첫 만남
“야 인마! 차 빼!”
누구한테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 제가요?”
분위기 파악이 안 된 내가 엉거주춤 사부를 쳐다볼 찰나.
“알았다. 어디 가나? “
헉. 이건 뭐지? 어디선가 중저음의 허스키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사리, 팔당 찍고 양수리로.”
사부는 지시를 내린 다음 눈만 멀뚱 거리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인사 나눠라. 녀석은 인공지능이다. 하지만 나의 부관이니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없는데 인사를 어떻게 나눌까요?"
내가 반문하는 찰나.
“이 자들이 새로 들어온 제자들이군. 반갑다. 난 페룬 Perun이라고 한다. 몸은 없지만 마음은 너희 곁에 있으니 그냥 말로 인사하면 된다. 보이스 투 보이스 모르나. “
말은 청산유수다. 문득 나는 인공지능도 성격이 급한 녀석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AI에게 감정을 실었다는 얘긴 아직 못 들었는데..
"안녕! 난 하은설이라고 해. 우와. 보이스 생성 되게 자연스러워요. 사부님. 근데 얘는 왜 반말이죠?"
역시 써리가 자연스럽게 한번 걸고넘어져 본다.
"그건 너네 사부가 한국어 존댓말 모듈을 구입하지 않아서 그런 거다. 존대를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다."
"반가워. 난 김이찬이야. 앞으로 재밌게 지내자고! 그런데 이것 참 재밌네요. 보통은 반대 아닌가요? 존대를 기본으로 하고 옵션으로 하대를 하는 것이. 사부님 혹시 무슨 심오한 뜻이 있으셨던 걸까요?"
사부는 약간 찔리는 게 있는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말끝을 흐린다.
"그냥 비용절감이지. 카페 장사도 시원찮은데..."
"그게 문제라면 너네도 나한테 하대해라. 그럼 되지 않느냐."
"올.. 진짜? 서로 말 놓으면.. 그럼 우린 친구네."
"그렇지. 너희랑 나랑은 친구 사이. 근데 난 너네 사부한테도 말 놓으니까 너네 사부랑도 친구, 결국 삼단 논법에 따라 너네도 너네 사부랑 친구. 그렇게 되겠네. 크크크크."
쓰읍? 아무래도 저 녀석 감정표현이 너무 자연스러운데. 저거 어디서 개발한 모델인지 나중에 한번 알아봐야겠다.
우리와 페룬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시작되었다. 워크샵을 가겠다는 사부의 방침대로 우리는 페룬이 운전하는 Level 5 완전자율주행 SUV를 타고 카페를 나섰다. 평일이라 도로는 시원하게 소통이 원활했다.
도심을 빠져나오자 차창 밖으로 제대로 된 한강 뷰가 펼쳐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개방감. 그동안 너무 대학로 뒷골목에서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오늘 같이 바람 쐴 일이 없었다. 기분이 좋았다. 어느덧 차는 팔당을 지났다.
"일단 경치나 좀 즐기고. 양수리 들어가면 '목(木)'에 대해서 논해 보자꾸나. 목 하나만 제대로 이해하면 나머지 화금수는 자동이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것이 제자의 품격이다. 너희들이 과연 그 정도인지 한번 지켜보겠다."
보통의 인공지능들은 뭔가 물어보면 답을 하거나 아니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페룬 녀석은 시키지 않아도 묻지 않아도 마치 사람처럼 낄끼빠빠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 정도는 된다고 보니까 내가 제자로 받았지. 녀석아."
"뭐 곧 확인되겠지. 네가 맞나 내가 맞나."
우와. 솔직히 나는 여 노인이 우리가 알바로 들어오기 전에는 조금 외롭게 지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가족도 없는 것 같고. 또 사실 너무 고령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페룬과 티격태격하면서 전혀 심심치 않게 지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녀석 반려 AI인가.
"자 여기 경치 좋으니 이제 공부 좀 해라."
페룬은 두물머리 근처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수부가 빚어내는 육지 안의 바다 같은 풍경. 언제 봐도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만든다.
여인모 목(木)을 정의하다
"마일강의 사주를 볼 때 내가 그랬었지. 그 녀석의 대표사주는 목이라고. 오늘은 목이다. 야 인마, 서울시 월평균 최고기온 데이터 뽑아봐."
저 '야 인마'라고 하는 말은 아마도 페룬한테 일을 시킬 때 최초 구동어로 쓰이는 단어인 것 같다.
"귀찮게시리. 자 여깄네."
페룬으로부터 톡이 왔다.
"자 이걸 보면서 목에 대해 설명하겠다. 나는 핵심만 일러줄 테니 디테일한 건 페룬하고 얘기하면 될 것이야."
여 노인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오행 강의하는데 저런 데이터가 왜 필요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야 인마! 저거 그래프로 그려봐. 데이터시각화 몰라? 비주얼라이제이션!"
페룬이 또 톡을 보내왔다.
"자네들 눈엔 이게 뭘로 보이나?"
내가 저것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아닐까 생각하며『어린 왕자』를 떠올리고 있을 때, 빠릿빠릿한 써리가 먼저 치고 나간다.
"사부님 저것은 정규분포 그래프가 아닐까 생각되옵니다."
"그렇지 그렇지. 또 너는?"
사부는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대답을 못하면 어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난 수학 전공이다.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정규분포도 맞는데 그렇게 보기엔 좀 빵실하게 두껍네요. 제가 보기엔 저건 삼각함수죠. 지금 이건 y = -cos(x) 입니다."
"흠흠. 애들이 영 바보는 아니구나."
페룬의 첫 번째 칭찬이었다. 물론 과찬은 아니다. 저게 만약 사람이었다면 팔짱 딱 끼고 거드름 피우는 게 아주 그냥 안 봐도 눈에 선하다.
"그렇다. 저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면서 구해지는 최고기온 숫자를 표현한 그래프다. 너희 대답이 둘 다 맞는구나. 제일 왼쪽을 1월, 맨 오른쪽을 12월이라 생각하면 되겠지. 목의 영역은 바로 회색으로 칠해 놓은 이곳이다. 계절로는 봄이고, 대략 1월부터 3월 사이를 말한다. 전반적으로 기온이 아니 에너지라고 하자.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변화하는 중이지."
"최고기온 숫자를 보고 우리가 여기서 하나 더 간파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뭔가?"
"에이. 얘네들이 그걸 어찌 알겠소. 갓 신입들 아니오."
저 저 페룬 말하는 것 좀 보소. 나는 알바 첫날 융의 싱크로니시티를 가지고 사부가 나를 놀려먹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참 칼 구스타프 융의 싱크로니시티 그것도 공부해야 되는데. 이거 점점 할 게 많아지는군. 그건 그렇고. 일단 진압을 해 줘야지.
"에이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러시네. 바로 하나 더 나오죠. 미분값!"
"맞아요. 저 모양이 어차피 코사인 그래프라면 미분해서 다시 사인 그래프가 되겠죠. 그게 기온이 올라가는 속도가 될 것이고요."
역시 써리도 기본기는 탄탄하다. 1월에서 2월, 그리고 2월에서 3월로 넘어갈 때 최고기온은 거의 두 배 가까이 가파른 속도로 올라간다. 하지만 6월에서 7월, 7월에서 8월을 보라. 두 배는커녕 0.1배 정도에 불과하다. 기온이 오르는 속도가 달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든다는 얘기다.
"자 이제 중요한 건 다 얘기했네. 페룬 이제 네가 마무리해."
페룬은 또 다른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졌다. 뭔가 자꾸 구조화를 하고 있는 듯하다.
"저기요 사부님."
써리가 손을 들었다.
"그래그래. 우리 써리 무엇이 궁금한고?"
"오행이 원래 목화토금수인데 저기에는 토가 보이질 않습니다. 어찌 된 영문일까요?"
"오호라. 역시 우리 써리 냉철하다 냉철해. 그래 토가 없지 저 표에서는 말이야. 토는 저걸 다 공부한 다음에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 걱정 말거라. 표를 저렇게 그려 버리면 토를 끼워 넣을 자리가 없어. 그래서 그런 게야. 차차 알게 돼."
맨날 우리 써리 우리 써리. 난 단 한 번도 우리 차니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심드렁 해 하는 사이, 사부는 몇 마디 더 일러주고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오행(五行)을 두고 고대 중국의 현자들이 쓴 책 중에 ≪상서(尙書)≫ 홍범편(洪範篇)을 보면 상당히 인상적이고 직관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
목(木)은 곡직(曲直)이라 굽고 곧은 것이니, 나무는 위로 솟고 풀은 옆으로 뻗는다. 화(火)는 염상(炎上)이니 불길이 위로 타오르고, 토(土)는 가색(稼穡)이라 심은 것을 거둔다. 금(金)은 종혁(從革)이라 따르고 바뀌는 것이니 자유롭게 변형되고, 수(水)는 윤하(潤下)라 젖은 것이 아래로 내려온다.
"제자들은 듣거라. 옛사람들이 음양과 오행의 체계를 만들어 놓고서도 저런 시적인 문구를 통해 용어를 정의한 것은 어떤 이유인가?"
어쭈 호랑이 사라진 곳에 여우가 왕노릇 한다더니 딱 지금이 그런 격이다. 페룬이 우리를 상대로 지도학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옛사람들의 혜안을 굳이 들춰낼 필요가 있겠나. 그냥 조용히 덮어두자."
나도 페룬의 말투를 흉내 내며 저항을 시작했다. 하지만 페룬은 농담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것은 고대 중국에 수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띠용.. 그렇긴 하지. 수학은 서양의 물건이었으니까.
"음양과 오행을 개발해 놓고서도 수학적 도구가 없었으니 더 엄밀한 정의를 하지 못하고 아포리즘으로 끝낸 것이다. 수학 같은 분별지 형태가 아닌 암묵지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들만의 리그, 비인부전(非人不傳)이 되어버린 것이지."
두물머리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페룬의 나직한 목소리를 통해 조금씩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까 운동방향과 속도로 목화금수를 분별한 것은 본 길드의 독문무공(獨門武功)이다. 너희 같은 직전제자(直傳弟子)에게만 전수된다. 제자들은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될 것이야."
페룬의 방자함이 극에 달했을 때 사부가 다시 돌아왔다.
오행은 새로운 수학적 객체가 될 수 있을까?
"시꺼. 인마. 그리고 너희들 앉아보거라. 고대 동양에 수학이 없었다는 얘긴 들었을 테고. 그래서 사부는 음양오행을 수학으로 정의하는 작업을 장기간 이어왔다."
"사부님! 이거 너무 재밌는 것 같아요. 소녀 제대로 배우고 싶사옵니다."
"우리 써리 그러니까 내가 제자로 받지 않았더냐. 그래서 내 너희 둘에게 묻겠다. 자. 목은 운동하는 방향과 속도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진다. 이것은 나머지 오행과 겹치지 않는 고유속성이다. 목은 스칼라인가 벡터인가 아니면 다른 건가? 내 분명 예습을 좀 하고 오라고 하였다."
이거였네 이거. 예습하라는 이유가 이거였어. 이건 써리가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수학의 객체론에 해당되는 것인데 내용은 단순하지만 어마어마하게 철학적인 분야다. 난이도는 이런 게 제일 높다. 스칼라는 숫자처럼 크기만 가진 변량을 의미한다. 벡터는 크기를 갖는 동시에 방향도 가진 변량이다.
"제자 한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설명해 주신 목과 같은 오행은 일단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으므로 스칼라 객체는 아닙니다. 크기와 방향을 가진 벡터와 유사합니다."
"공부에 진전이 있었구나. 그렇지 하나의 오행만 놓고 보면 벡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주명리는 더욱 복잡한 체계를 갖고 있지. 내가 마일강이한테 정인격(正印格)이라고 얘기했던 것 기억나나?"
"그래서 신학 공부하라고 하셨죠."
"그건 그 녀석 사주에 수(水)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야. 수생목이라하여 상생관계가 되거든. 참 사주에서 얘기하는 상생관계는 요즘 아이들이 얘기하는 시너지효과 그런 거 아니야. 대형마트랑 전통시장 상생하는 거 아니고. 한쪽이 죽고 한쪽이 사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어둠이 가고 아침이 밝으면 어둠은 사라지고 아침은 생겨난다. 어둠과 빛은 공존하지 않는다."
사부는 상생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수 하나 + 목 하나 = 목 둘
"이 속성까지 고려하면 오행은 그래도 벡터인가? 아니면 2차 텐서인가?"
객체 개념이 텐서로 확장되면서 기존의 스칼라는 0차 텐서, 벡터는 1차 텐서로 구분하고 더 추가적인 속성을 가진 것을 2차 텐서로 정의했다. 사부의 얘기는 오행의 상생상극 속성까지 고려하면 2차 텐서냐는 질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무슨 질문인지 이해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주변이 아득해졌다. 약하게 철썩거리던 강물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텐서만을 사유했다. 이것은 어떤 객체인가?
"사부님."
이제까지와는 조금 달라진 나의 목소리에 사부는 흠칫 놀란 듯했다. 써리도 마찬가지.
"사형.."
"정녕 깨달음을 얻은 게냐? 너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구나."
"... 이건 텐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속성뿐만 아니라 관계와 연산이 결합된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수학적 객체입니다."
(8화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이 글은 작자의 상상을 펼친 허구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조직, 각종 사건 등의 소재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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