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일러와 태극이라.. 서로 같은 것을 보았군(2)

by 김톨


우리는 오일러 공식을 통해 복소평면에 그려진 원(圓)은 정지된 원이 아니라 움직이는 원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원을 단일의 수식으로 기술한 오일러 공식의 구성요소를 보면 허수와 삼각함수, 자연대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결국 아래 두 그림은 동일한 내용을 달리 표현한 것이 되어 버렸다.


왼쪽의 원은 복소평면에서 순환을 반복하는 움직이는 동그라미이고, 오일러 공식에서의 매개변수 쎄타값을 수평축으로 두고 삼각함수 값으로 표현하면 오른쪽과 같은 파동이 된다. 순환하느냐 방향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 다를 뿐 원과 파동의 본질은 동일하다. 주기적인 움직임을 반복한다. 그것이 변화이다. 서양은 레온하르트 오일러라는 불세출의 천재를 통해 18세기에 와서야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태양이 1년 동안 나를 비춘 그림자, 그것이 태극이다



이제 동양의 태극(太極)을 살펴볼 차례다. 위 삼각함수 그래프의 모양은 태극기에 그려진 태극과 실제로 닮았다. 하지만 필자는 지난 연재를 통해 태극과 파동은 모습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본질까지 동일하다고 언급했다. 오늘은 그걸 풀어볼 차례다. 먼저 태극이라는 다이어그램(diagram)이 그려지게 된 경위부터 살펴보자.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날짜와 시간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시계를 보면 된다. 그러나 태양력이 없던 시절이라면 어땠을까? 달력과 시계가 없다면? 누군가와 약속을 한다거나 언제쯤 행사를 벌인다거나 하는 일상의 여러 가지 일들에서 차질과 불편함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2천년 전이라면 그 정도로 끝났을까?


1년 간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달력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표였다. 농사가 국가경제의 전부이고 정치체제의 근간인 시절이었다. 그런데 달력이 없다면? 지금 시대에 스마트폰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것 이상의 큰 혼란이 불을 보듯 뻔하다. 동양의 천문학은 바로 이 문제를 푸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해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동양 천문학의 목적은 우주탐사 같은 것이 아니라 농업경제에 필요한 역법(曆法)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당시 언제 심고 언제 거두냐 하는 문제는 한해의 소출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큰 의사결정이었다. 관상수시(觀象授時)라는 말은 하늘을 관찰하여 백성들에게 때를 알려준다는 뜻이다. 이것은 위정자의 가장 큰 임무였으며 이를 통해 국왕은 그 지위에 합당한 자격을 인정받았다. 현대의 CEO와 다를 바가 없다.


고대 중국의 천문학은 은대(殷代)의 갑골문에서도 어느 정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갑을병정.. 하는 10 천간과 자축인묘.. 하는 12 지지는 이때부터도 발견된다. 지금은 미신적이라 치부되는 60 갑자가 사실은 문명이 부재했던 그 옛날, 청동기인들과 철기인들이 생존을 위해 고안해 낸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다는 점은 일단 체크해 두자.


천문과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후한(後漢) 시대의 문헌주비산경(周髀算經)에 나타난다. 일단 역법 측면에서도 윤달이 포함된 태음태양력이 확립되는 등의 큰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확한 역법을 개발하기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해 해와 별의 움직임을 관찰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오늘 우리의 주제인 '태극'을 마주하게 된다.


이 무렵 사용되었던 규표(gnomon)라는 해그림자를 관찰하는 기구가 있다. 우리나라 세종대왕 시절에도 있었는데 아래와 같이 생겼다.

*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한국문화사

*우리역사넷 바로가기 :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5_0040_0030


이 장치는 일종의 해시계인데 하루 동안의 시간을 측정하는 목적이 아니라 1년의 절기를 해 그림자를 통하여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계된 측정기구였다. 위의 사진은 실제 사이즈의 1/10 축소모형이라고 한다.


*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한국문화사



위 일러스트는 유렵에 고대 중국의 문화를 학문적으로 소개하는데 혁혁한 공로가 있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조세프 니담(Joseph needham, 1900~1995) 교수가 고대의 규표 개념을 그린 것이다. 니담과 관련해서는 추후에도 종종 언급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식의 관측기구를 사용해서 고대 중국인들은 철학적인 관념보다는 실무적인 이유로 아래와 같은 태극 문양을 본의 아니게 얻어내게 된다. 태극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해 그림자가 어느 위치에 드리우냐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절기가 도래했는지 아직 멀었는지를 판단하려고 했다.


*출처 : 중국 자료 사이트 doc88.com : 论太极图是原始天文图


자 이것이 서기 200년 무렵 후한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의 도식이다. 태극기의 정반원 모양의 태극보다 조금 만곡이 더 깊이 파이긴 했지만 결국 이것은 삼각함수의 파동과 모습이 동일하다. 만곡이 깊고 얕고의 문제는 조금 뒤 살펴보겠지만, 명확한 이유가 있으므로 설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렇듯 태극이라고 하는 것은 심미적으로 그려진 '무늬'가 아니다. 절기를 파악하기 위해 실증적으로 파악된 원시 천문도라고 보아야 한다. 천문은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나타낸다. 지구는 태양을 공전한다. 원운동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원운동을 파동과 동일하다. 해그림자 태극은 지구의 원운동이 파동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미지이다. 필자가 오일러의 원과 동양의 태극은 모습 뿐만 아니라 본질도 동일하다고 얘기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자, 이제 위의 해그림자가 어떻게 파동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이 태극의 작도방법 부분은 한의사로 추정되는 네이버 블로거 '햇님달님'님의 2014년 포스팅 '시계 / 시계반대방향 (3) 태극도 회전방향 : 좌선, 우선'의 내용을 요약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힌다. 어마어마한 지식을 공유해 주심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햇님달님님 역시 이 자료가 위 중국 자료 사이트에 게재된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을 밝히셨다.


*출처 : 위 햇님달님 포스팅


위와 같이 동지 때와 하지 때에는 태양의 고도가 다르다. 하지 때 가장 높고 동지 때 가장 낮다. 따라서 지상에 고정된 어떤 막대(규표)의 그림자는 태양의 고도에 따라 하판에 찍히는 위치가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태극은 1년 동안 매일 매일 정오에 관찰한 이 해그림자의 궤적을 뜻한다. 위 도표를 보면 규표의 하판이 원형이 아니라 길쭉한 직사각형이다. 그런데 어떻게 원형의 태극 모양이 그려질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그림자의 궤적을 규표 하판에 찍는 것이 아니라 아래 사진과 같은 '석일구(石日晷)'라고 하는 원형으로 생긴 하판에 궤적을 찍기 때문이다.

*출처 : 중국 사이트 https://sucai.redocn.com/yishuwenhua_6118230.html


이것을 실물사진이 아닌 도식으로 보면 아래와 같이 생겼다.


*출처 : 위 햇님달님 포스팅


이제 실제로 태극 모양의 그림을 그려보자. 먼저 하지날 정오 위 석일구에 그림자 궤적을 하나 찍는다.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은 만큼 그림자의 길이는 가장 짧을 것이다.


*출처 : 위 햇님달님 포스팅


그다음 날은 아래 석일구 하판을 딱 한 칸만 반시계방향으로 돌려서 그날의 그림자 위치를 찍는다. 이것을 하지와 동지 사이 중간에 해당되는 추분일까지 진행하면 아래와 같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출처 : 위 햇님달님 포스팅


1년의 1/4이 진행되었다. 조금씩 태극의 모양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림자가 가장 긴 동지까지 열심히 궤적을 찍어 본 결과는 아래와 같다. 해의 위치와 유표의 그림자 끄트머리를 곰곰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출처 : 위 햇님달님 포스팅


태극의 절반이 그려졌다. 자 이제부터는 동지에서 하지로 가는 코스다. 해가 길어진다. 그 말은 그림자가 짧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판을 180도 돌려서 다시 그림을 그리면 아래와 같은 모습이 된다. 자세히 보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유표라고 하는 장치가 원래 왼쪽에 있었던데 오른쪽으로 가버렸다. 이제 그림자는 유표가 아닌 정표로 만들어진다.


*출처 : 위 햇님달님 포스팅



이렇게 해서 다시 하지가 되어 완성된 태극이 아래 그림이다.


*출처 : 위 햇님달님 포스팅


보다시피 태극은 이렇게 그려졌다. 필자의 오늘 포스팅을 읽는 독자분들 거의 대부분 아마도 태극이란 것은 그냥 철학적인 개념을 디자인한 문양이 아닐까 생각했을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오늘 보았다시피 태극은 디자인이 아니다.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소출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당시 가용한 모든 지혜를 다 짜내어 만들어낸 농경을 위한 실무지표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슈퍼컴퓨터로 계산해서 전해주는 일기예보 아닌가. 태극이 만들어진 취지는 점을 치거나 미신적인 그런 게 아니라 이렇듯 아주 실용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해서 얘기하고 싶다.


태극기 안에 있는 만곡 없는 태극과 위와 같이 깊이 파인 태극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민할 것도 없다. 북반구의 위도 차이에 따라 발생한 것이다. 저위도 지역이냐 고위도 지역이냐에 따라 해 그림자의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만곡도 그에 연동하여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이건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태극과 오일러에 대해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 보자.


앞서 잠깐 언급한 바가 있지만, 태극은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과정, 즉 원운동에서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원래는 원운동으로 끝나는 것인데 하지에서 동지로 갔을 때, 즉 1년의 절반이 지났을 때 석일구 하판을 180도 뒤집었다. 만일 이것을 뒤집지 않고 그냥 놔둔 채 계속 그려나간다면 그림은 아래 모습이 된다. 조금 헷갈릴 수도 있지만 위의 그림들을 잘 살펴보면 아래 그림이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아래 그림은 조금 깊이 파인 만곡으로 인해 하트 모양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위도가 적당한 지역이라면 옴폭 패인 하트는 사라지고 원 안의 작은 원의 모습이 될 것이다.

*출처 : 위 햇님달님 포스팅


이제 살펴봐야 될 것들은 모두 나왔다.




오일러는 연역적으로 고대 중국은 귀납적으로 원을 그렸다



태극은 해를 공전하는 지구의 지표면에 형성된 그림자의 1년 간 궤적을 그린 것이다. 이는 오일러의 공식에서 쎄타값을 0도에서 360도로 계속 증가시키면서 원운동 하는 궤적을 뽑아낸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돌던 방향 그대로 돌면, 즉 원래의 위치로 회귀순환하는 경로를 채택한다면 그것은 오일러나 태극이나 동그란 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순환하지 않고 시간 방향으로 직진하겠다면 오일러의 공식은 삼각함수와 같은 파동함수로 변형되고, 태극은 하판을 180도 뒤집어서 물결 모양의 무늬가 만들어진다. 삼각함수의 파동과 동일한 모습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필자는 오일러의 공식이나 태극이나, 외관은 물론이고 본질까지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자 그렇다면 지난 포스팅 초반에 밝혔던 마지막 아젠다.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음 주에는 태극을 도식이 아닌 철학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중국 송대 유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태극도설》(太極圖說)로 정리된 무극부터 태극을 거쳐 오행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보면서 오일러, 태극과 같은 논란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의미가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오일러 #태극 #규표 #석일구 #인문학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일러와 태극이라.. 서로 같은 것을 보았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