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그렸던 원(圓)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동양철학의 상징과도 같은 태극무늬가 철학적 다이어그램인 동시에 원시 천문도로서 일상의 디테일과도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점 또한 확인했다. 오늘은 이번 미니연재 '오일러와 태극이라.. 서로 같은 것을 보았군'의 세 번째 포스팅이다.
먼저 주돈이(周敦頤, 중국 북송 시절의 유학자, 1017~1073)의《태극도설(太極圖說)》을 통해 음양에서 오행에 이르는 동양철학의 코어를 가볍게 살펴본 다음, 이번 미니 연재 첫 편에서 밝힌 세 번째 아젠다 '이런 담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를 집중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태극도는 이렇게 생겼다.
태극도와 관련한 전문 연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태극도설에서는 외부사물의 존재구조를 파악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성리학의 우주론은 곧바로 심성론 및 수양론과 연계가 된다. 성리학은 관심의 범위를 우주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마침내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정밀한 이론체계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음양오행설의 이해》김기 저, 도서출판 문사철, p.359
쉽게 말하자면 이전까지 윤리적 인간상을 실현하는데 방점을 두었던 유학(성리학)의 흐름이 우주론(존재론)으로 확대되었다는 얘기다. 이 정도 커버리지가 확보되어야 그리스 철학과 동양철학을 동급으로 언급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과정에서 근본사상으로 활용되었던 아이디어가 바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도교의 음양설이었다. 그렇다면 음과 양 그리고 태극은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가? 주돈이 태극도설의 핵심을 원전 텍스트 그대로 한번 짚어보자.
무극 - 태극 - 음양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니,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는데 움직임(動)이 극에 가면 고요(靜)해져 음(陰)을 낳는다. 고요함이 극에 가면 다시 동(動)하게 된다. 한 번의 고요함과 한 번의 움직임이 서로 뿌리가 되어 음과 양으로 나뉘면서 양의(兩儀)가 정립된다. -《음양오행설의 이해》김기 저, 도서출판 문사철, p.364
간단히 적혀있지만 저 텍스트 하나만으로도 책이 여러 권 나오는 철학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필자와 같은 일반인은 어려운 말로 하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쉽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다들 살면서 많은 것들을 그냥 스쳐지나 보낸다. 아침 출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에 서 있었던 누군가를 기억하는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임팩트가 없었다는 뜻. 바로 그것이 무극이다. 무극을 두고 도교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지극한 세계'라고 폼나게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다만 필자가 보기엔 나의 주변에 분명 존재하지만 내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그 모든 것이 무극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내 옆에 서 있던 그 누군가가 실수로 나의 발을 콱 밟았고 내가 평균 이상의 고통을 느꼈다면 이제부터 그 자는 무극이 아닌 태극이다. 음과 양의 움직임이 시동을 건다. 평온했던 나의 마음에 에너지가 주입되기 시작한다. 지금 이 상황은 무극이 양을 낳으면서 태극으로 변모하는 광경이다. '저 사람은 왜 조심성이 없을까? 애도 아닌데. 미안하다는 말도 한마디 없어. 앗 그런데 내 발이 조금씩 상태가 안 좋아지네. 통증이 밀려온다. 이거 정형외과 가봐야 되나. 그냥 넘어가려고 했더니 이쯤 되면 한마디 해야겠는걸. 치료비 받아내야지!' 양의 움직임이 극으로 치닫는 것이다. 사실 1초도 안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반전이다. 슬슬 음의 시간이 다가온다.
'저기 죄송한데요. 제가 쇼핑백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있다 보니 잠깐 중심을 잃어서.. 혹시 괜찮으세요? 다치시진 않으셨구요?' 양이 극에 달했다가 고점을 찍고 음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한다. 얘기하는 표정에 진심이 어려있다. 여전히 그 자는 두 손에 백을 하나씩 들고 불안한 자세로 어정쩡하게 서 있다. 마음이 많이 풀린다. 그럴 수 있었겠네.. 버스가 급정거를 하면서 나도 중심을 한번 잃는다. 이제 그 자가 더 잘 이해된다. 용서해도 내 자존심에 상처는 남지 않을 것이다. 음이 바닥을 치는 순간이다. 그래.. 이건 넘어가도 괜찮아.
이런! 그자와 같은 정류소에서 내렸다. 게다가 우리는 같은 빌딩 방향으로 걷고 있다. 심지어 딱 내 스타일의 매력적인 이성이다. 다시 양의 기운이 동하기 시작한다.. 발 밟았으니 커피나 한 잔 사라고 할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던 사람(무극)이 내 발을 밟음으로써 나와 어떤 한 가지를 공유하는 유의미한 사람(태극)이 되었다. 무극에서 태극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음과 양이 교차한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한 번의 눈인사로 영원히 끝나 버릴 수도 있고, 회사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함께 하는 인연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것이 음과 양이 만들어 낸 양의(兩儀)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 수많은 것들과 스쳐 지난다. 그 와중에 무극도 태극도 양의도 같이 스쳐 지난다.
에피소드를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했지만. 이런 것이 무극 - 태극 - 음양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동양의 우주론이다. 빅뱅이론과 같은 물리적 우주론은 아니다. 동양의 우주론은 세상일이 돌아가는 흐름과 그 이치를 논한다. 사람에겐 오히려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주역은 시뮬레이션
지금까지의 눈팅으로 살펴본 음양론을 디테일하게 확장시킨 시나리오가 바로 주역(周易)이다. 음양에 기반한 이진법을 토대로 8괘를 거쳐 64괘까지 나아간다. 괘 하나에 효가 6개 들어있으니 세상사의 흐름에 관한 총 384개의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주역에 관하여 필자는 별도의 연재계획을 갖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주역을 바라보는 필자의 시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주역은 시뮬레이션 Simulation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역은 무엇을 시뮬레이션하는가?
주역은 사람의 삶을 시뮬레이션한다. 서양에는 없는 시뮬레이션 툴이다. 위에서 사례를 든 에피소드는 아주 간단하다. 그에 비해 실제 우리의 삶은 더 복잡하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문제들에 봉착한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먼저 서양의 인과관계식 논리로 파악할 수 있는 데까지 충분히 원인과 결과를 파악해야 된다. 이런 합리적인 판단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을 무시하고 주역만 쳐다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신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인과관계를 더 이상 분별해 내기 어려운 또는 더 많은 추가정보를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쓸 수 있는 서양식 도구는 없다. 그럼 어떡하나. 감으로? 촉으로? 하지만 우리에겐 주역이 있다. 더 이상 인과관계를 판별할 수 없을 때, 더 이상의 정보는 도저히 구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의사결정해야 되거나 판단을 내려야만 될 때. 바로 그때 주역 시뮬레이션이 역할을 할 수 있다. 남들은 주역점이라고 얘기하지만 필자는 시뮬레이션라 부른다.
서양의 전통과 다른 점
필자가 이번 미니 연재 서두에서 던졌던 세 번째 아젠다는 '그래서 이런 담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였다. 갑자기 동양철학? 사실 뜬금없다. 하지만 나는 21세기로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기존의 서구식 가치관을 보완할 수 있는 동양의 철학을 접목한 유기적인 세계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 칼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하부구조는 상부구조를 움직인다'라고 보았다. 맥락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기술문명의 급격한 발달로 인한 하부구조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상부구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서양의 전통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서양은 틀렸고 동양이 맞다는 주장을 할 생각이 없다. 서양의 부족한 점은 동양의 것을 재해석하여 메꿀 수 있다. 딱 여기까지다.
서양의 합리적 지성들이 동양의 태극과 음양 사상에 눈길을 주는 이유는 단순한 문화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왜 그럴까? 그것은 동양의 사상에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없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몇 개만 짚어보자.
그 핵심은 '변화'의 사상이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이분법적 구조에 익숙하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강조해 왔다. 일부러 머리 써서 구분하고 나눠놨기 때문에 그것들은 고정적이고 정태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 조만간 고난이 눈 녹듯 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직면한 고달픔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여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태극과 음양은 대립적인 두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끝없는 변화를 통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는 "대립은 곧 통합"이라는 방식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서양의 정태적 사고와 본질적으로 대비된다. 어려운 일은 반드시 지나간다. 동일한 논리로 좋은 일은 영원할 수 없다. 이건 부자나 성공한 자들에 대한 저주가 아니다. 세상의 본질이 '변한다'라는 얘기다. 태극의 굽이치는 무늬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불교에서 얘기하는 무상(無常) 역시 '항상이란 것은 없다'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결국 변한다. 물론 막무가내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순환하면서 변한다. 이 대목에 각별히 유의하여 생각을 하다가 뭔가 느낌이 온다면 그 사람의 인생관이 어느 정도 바뀔 수도 있다.
또한 현대 과학의 최고난도 분야 중 하나인 복잡계 과학에서는 비선형적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여기서 비선형이란 필자의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다대일 대응을 의미한다. 원인과 결과라는 일대일 대응이 아닌 순환과 피드백이라는 다대일 대응이 현실적으로 관측되는데 정작 이것을 설명해 주는 이론은 동양의 사상이다. 이는 음양의 상호 작용 논리와 유사하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전환되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회귀하는 흐름에서 과학적인 아이디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시각적으로도 태극 문양은 수학자와 디자이너의 관심을 끈다. 대칭과 회전, 곡선과 대립의 조화는 단순한 기호를 넘어선 구조를 표현하는 추상언어의 기능을 한다. 실제로 앞서도 언급했던 양자역학의 창시자 닐스 보어는 자신의 가문 문장에 태극 문양을 새겼다. 이는 음양의 상보성과 양자역학의 보완성에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음을 암시한다.
요컨대, 태극과 음양은 고대 동양의 상징이자 동시에 미래 과학과 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대립과 통합, 정태와 동태, 분석과 총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사유의 언어이며, 그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그리고 새로운 학문적 자극이 된다.
마지막 특징은 '관계'
오늘은 태극과 음양의 철학적 측면을 짚었다. 태극도설의 중단에는 음양의 단계를 지나 상호작용하는 오행이 그려져 있다. 아직 언급하지 않은 동양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에 '관계'라는 것이 있다.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오행의 상생상극 및 생극제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다음 주에 다룰 것이다.
위에서 발을 밟은 자와 밟힌 자의 에피소드를 무극 - 태극 - 음양 변화의 예시로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 같이 내려선 그들의 인연은 그걸로 끝인 경우도 있고 뭔가 더 이어질 가능성도 남아 있다. 여기서 '관계'가 등장한다. 주는 것 없어도 좋은 사람. 나한테 해코지하지도 않는데 왠지 꼴 보기 싫은 사람. 어떤 관계일까? 이런 문제는 오행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다음 주 포스팅에서는 오행의 상생상극 체계를 설명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동양 술수학(한의학, 사주명리, 풍수, 관상 등)의 특징을 다룰 생각이다. 그까지 가면 오일러와 태극에 관한 이번 미니연재는 끝이 난다. 그다음에는 오랫동안 방치했던 노바 오딧세아 메모지를 다시 펼쳐 보면서 여정을 추슬러야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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