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ginning
나는 살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공부를 많이 했다. 가방끈도 땅에 질질 끌릴 정도다. 그런데 작년 언젠가 문득 '더 이상은 배우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평생교육 얘기하는데 '배우지 말자?' 그렇다. 나는 2025년부터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 이미 배운 것들을 날실과 씨실로 엮어 보기 좋은 천을 짜보자. 아무도 안 짜는 천이면 더 좋고. 실은 더 이상 필요없다. 실이 더 들어오면 창고에 쌓아 둘 자리도 이젠 없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상황이었다.
2025년 설날 아침 브런치팀에서 보낸 작가승인 알림을 확인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작년 연말에 내가 결심한 것은 '더 이상 배우지 않기'와 '생각나는 것을 쓰기'였다. 쓰기를 위해서 선택한 것이 브런치스토리였다. 원래 나는 오래전부터 막연하게 웹소설 플랫폼인 문피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브런치는 워낙 유명매체였기에 가끔 눈팅은 했지만 나의 슬기로운 핸드폰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이제부터 진짜 쓰겠다고 생각하니 나도 뭔가 플랫폼을 골라야 했다. 그래서 원래 생각하고 있었던 문피아를 해야 되나, 진입장벽 없는 티스토리로 가야 되나, 요즘 블로거들은 다들 워드프레스로 옮기는 추세라던데, 브런치는 작가승인이 어려워서... 등등 많은 얘기들이 있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나의 결론은 브런치였다. 문피아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웹소설의 강도높은 매일연재 룰을 지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일단 접었다. 문피아는 규정상 1화당 5천자 이상 분량이다. 내가 연재하고 있는 『노바 오딧세아』와 『카오모스』가 대략 1화당 그 정도 글자수가 된다. 초반부터 문피아 분량으로 습관을 들일려고 그랬던 것인데.. 그 또한 나의 실수였다. 문피아나 네이버시리즈 카카오페이지 류의 웹소설들은 가벼운 스낵컬처라 읽기에 부담이 훨씬 덜하다. 5천자라고 해도 그냥 쓱 읽을 수 있다. 오히려 분량이 짧으면 독자들이 거칠게 아우성을 친다. 100원 날로 먹는다고. 그에 비하면 브런치는 내 글이나 다른 작가님들 글이나 훨씬 무게감이 있다. 진지하다. 나의 연재 카오모스도 나름 무거운 편인데. 노바 오딧세아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그런데도 5천자씩이나 써댔으니. 독자분들께 죄송할 따름이다.
문피아에 정식 연재하는 것은 그런 사정으로 일단 보류했지만 - 물론 내가 먹히는 웹소설을 쓸 수 있나 없나는 또 다른 문제다. 그건 안해봐서 아직은 모르겠다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원래 내 목표는 두 가지였다. SF소설가와 인문학 에세이 저자. 두 가지를 다 하기에는 브런치가 최고의 플랫폼이라고 보았다. 한가지 더 실질적인 이유는 브런치에는 광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여기서 활동하시는 작가님들이 수익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지만, 독자에겐 아주 클린한 환경이 조성된다.
생각해 보니 브런치에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던 계기가 하나 더 있다. 사실 이런 걸 두고 넛지 Nudge 라고 하는데.. 플랫폼을 고르려고 이곳저곳 들여다 보던 중 2024년 브런치북 출판대상이란 걸 알게 되었고 거기서 문혜정maya 작가님의 『타로카드 읽는 가게1』라는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도 비슷한 컨셉으로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가방끈에는 명리학도 한 줄 열쇠고리 수준으로 달려 있다. 그래서 브런치에 작가승인 신청할 때 이 내용을 강조해서 기재했다. 문혜정maya 작가님과 소재는 비슷하지만 주제는 다른 작품을 쓸 것이라 적었다. 이것이 내가 카오모스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결과적으로 그것도 시행착오였다. 문혜정 작가님 수준의 감성적인 글을 나는 쓸 수 없다는 것은 원래 잘 알고 있었던 바다. 그래서 나는 그 부분은 포기하고 과학과 철학을 혼장시킨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글 읽는 재미를 추구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어떤 주제(상품)에 맞는 독자층(수요층)이 탄탄해야 된다는 것은 굳이 글쓰기 플랫폼이 아니더라도 모든 비즈니스에서 기본적인 전제조건일 것이다. 돈 버는 비즈니스 얘기가 아니고 세상살아가는 일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틈새시장을 파고 들고자 노력했으나 내가 다루는 소재의 특성상 독자층이 정말 얇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글의 완성도가 떨어져서 독자가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나의 초심은 어떻게 해야 될까? 이미 휴재선언은 해 버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