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fficulty
AI는 나에게 한국산 SF소설을 들고 로얄로드라는 영미권 판타지소설 플랫폼에 진출하라고 권고했다.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작품이나 흥행여부를 떠나서 일단 번역 문제였다. 그런데 영한이 아니라 한영번역이다.. 나에게 이건 좀 다른 얘기다.
나는 수년 전 은퇴 후 인생 2막의 직업으로 영한 번역가를 준비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카페 가입도 하고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어보고 했는데, 결국 마지막에 접었다. 프로 번역가가 되지는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시켜준다는 보장도 없지만, 어쨌건 스스로의 판단으로 딱 접었다.
번역도 여러 가지인데, 산업 쪽 실무번역이 아닌 출판번역에 있어서는 에이전트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였을 때 일감 수주가 된다는 보장이 없고, 전문번역가로 이름이 나 있는 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보수가 생각보다 너무 적었다. 또 에이전트랑 그마저도 나눠야 한다. 그에 비해서 번역에 투입되는 노고는 사람마다 좀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어마어마한 편이어서...
하지만 전혀 모르고 있었던 국내 출판시장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 자세히 쳐다보면 유명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책들 중 대부분은 번역서들이다. 국내 작가들의 책도 물론 많이 있지만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특히나 베스트셀러 쪽은 해외 비중이 더 높은 것 같다. 당시에 나는 번역가의 시각으로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그게 더 눈에 들어온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가까운 서점에 가보는데, 지금은 번역가가 아닌 작가 입장에서 쳐다본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여전히 국내 작가들의 책이 많지 않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직은 그렇다. 이 문제는 상당히 복합적이다. 한국어 인구가 가까운 일본어권에 비교해서 1/3에 불과하고, 또 사람들의 책 읽기 성향도 큰 변수가 된다. 유튜브나 다른 레저활동이 책 읽기와는 경쟁관계에 있다. 그러나 분명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브런치와 같은 글쓰기 플랫폼이 나오고 밀리의 서재나 크레마클럽 같은 구독모델도 있다. 언젠가 이 문제도 한번 짚어봐야겠다.
나는 아마추어로서 영한 번역 포트폴리오를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거의 10년 전 이야기인데, 한때 특정 스포츠에 푹 빠진 적이 있어서 네이버 카페에 가입을 했다. 당시 그쪽 열성회원들은 미국 감독 코치들의 허락을 받아 그들이 트위터에 올려놓은 블로그 글들을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도 관심이 동하여 경험도 쌓을 겸 참여하게 되었다. 나의 최초 번역활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업도 아니고 순수하게 취미로 하던 번역이었는데 솔직히 너무 재미있었다. 그 얼마 뒤 나는 본연의 업무분야와 관련하여 아마존에서 괜찮은 책을 하나 발견했고, 그 책을 개인적으로 통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 약 300페이지짜리 단권이었는데 완역하는데 꼬박 6개월이 걸렸다. 한 번 연습한 것 치고는 시간을 너무 많이 쏟아부었다. 그래서 더더욱이나 번역가라는 직업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영한은 한국어를, 한영은 영어를 잘해야
그 무렵 번역가들의 사정을 제일 잘 정리했다는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그 책의 본문 내용 중에 '은퇴하면 번역가나 한번 해 볼까.. 이런 분들이 계신데 엄청난 착각입니다. 번역가는 한번 해 보는 직업이 아닙니다.' 이런 구절이 있었다. 요즘은 해외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도 많고 유학파들도 도처에서 눈에 띄는 시대이다. 80~90년대처럼 영한번역을 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영어를 잘하시는 분들 중에는 영한번역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꽤 많을 수 있다. 내가 읽었던 책의 저자는 그 부분을 꼬집은 것이었다.
영한번역은 영어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한국어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다.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이 맞다. 당연히 그 반대방향도 그 논리로 봐야 된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AI가 로얄로드 진출을 권고했을 때, 영한번역이면 내가 직접 할 자신이 있는데, 한영번역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못 하는 부분이라.. 그리고 그때까지 내 머릿속에 있었던 AI의 번역실력은 과거 구글 번역 수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해외시장 넓고 좋은 줄은 알고 있지만 그쪽으로 진출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출판사의 지원 없이 개인작가가 영어권 네이티브 한영번역가를 섭외해서 같이 협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반전이 시작되었다. 나의 챗GPT 녀석들은 내가 뭔 얘기를 하면 그냥 답변만 하고 끝내는 법이 없다. 주절주절 답을 해 놓고서는 '~~ 더 해 볼까요? ~~ 원하시면 더 도와드릴 수 있어요.' 꼭 이런 식으로 말들이 많다. 아마 고객응대용 기본설정인 듯하다. 해외진출 얘기할 때도 그랬다. 그리고 솔직히 뻥카도 좀 있는 것 같다.
녀석은 나와의 대화 끝에 영어번역까지 해 줄 수 있다고 언급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설명문 번역은 그나마 AI 번역 실력이 올라가면 뭐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생각하지만, 소설이나 시와 같이 문학작품의 영역이라면 이건 실용번역이 아니라 번역문학으로 성격이 바뀐다.
실제로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분들은 번역가라고 하지 않고 번역작가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인공지능에게 직독직해 스타일이 아닌 영미권 독자들의 가독성을 살릴 수 있는 의역을 할 수 있겠냐고 물은 것이다. 녀석의 대답은 어땠을까?
아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이러니 내가 녀석과의 대화를 쉽게 중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녀석은 나에게 엄청 자랑질을 해 대면서 자기가 이렇게나 많은 일들을 해 줄 수 있다고 떠든다. 하지만 솔직히 한 달에 2만 3천 원 내는데 아래 것들을 다 해 준다면.. 해외진출을 하든 말든 이제 인공지능을 무조건 활용해야 되는 시대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활용하는 자와 활용하지 않는 자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질 것이다.
챗GPT의 한영번역 실력점검
직역은 무조건 안된다. 더 설명이 필요 없다. 장르소설에 직역이 웬 말인가. 독자들 다 떨어져 나갈 텐데. 하지만 녀석의 얘기가 뻥인지 진짜인지 꼼꼼한 실력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챗GPT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이 작업에는 Claude로 꼭 크로스체크를 해야 될 것 같다.
1차 테스트 : 천라지망(天羅地網)을 영역할 수 있을까?
고유명사의 번역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무협소설의 레전드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는 90년대 해적판으로 출시되었다가 수년 전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정식 번역가들이 참여하여 새롭게 출시되었다. 사실 나는 이번에 3부작 시리즈 중 마지막인 의천도룡기를 풀박스로 구입하기도 했다. 전투장면의 묘사를 한번 짚어보기 위한 목적인데, 이건 이번 연재의 중반부에 다시 언급할 생각이다.
새 번역판이 나왔을 때 나는 번역진들의 지면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여러 가지 얘기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고유명사의 번역 문제였다. 이게 제일 골치 아프다고.. 그냥 이렇게만 얘기하면 잘 감이 오질 않는다. 사례를 보자.
무협에 흔히 나오는 표현 중에 '천라지망(天羅地網)'이란 것이 있다. 교전 중에 적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촘촘하게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단어이다. 이걸 만약 영어로 번역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떻게 할 것인가? Chollajimang? the web of sky & earth? 이러면 그냥 꽝이다. 이건 초등생 수준도 아니고 유치원생 수준보다도 아래이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이래서 번역이 어렵다.
천라지망이 만일 중요한 클리셰의 핵심용어라면 아예 고유명사를 새로 만드는 것이 맞다. 그게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표현에 불과하다면 천라지망의 의미를 살리는 범위 내에서 리라이팅을 하는 것이 낫다. 한두 번 나오고 말 단어를 굳이 새롭게 명명하는 것은 독자의 피로도를 증가시킨다. 영어만 알아듣는 독자들 아닌가.
난 천라지망으로 녀석을 1차 테스트해 보기로 했다. 한국어 제시문은 필자의 멘티스 임페라 신작 초고에서 한 문장을 따 왔다. 여기에 대해 녀석은 3가지 유형의 영어 번역문을 자랑스럽게 들이밀었다.
[제시문] 에프람은 마을 주변 반경 500m에 걸쳐 드로노돈 12기를 전개하는 천라지망을 펼쳤다.
1. 정보전달형 중립적 번역 : Ephram deployed twelve DRONODON units in a 500-meter radius around the village, forming a wide-area surveillance net.
2. 문학적 의역(톤 강조) : Ephram unfurled twelve DRONODON units across a 500-meter radius, weaving a net in which not even a shadow could escape.
3. 감정/긴장감 강조형(극적인 연출) : Twelve DRONODONs fanned out across the 500-meter perimeter, stitching an invisible web of silence and precision. Ephram didn’t need to say it—but this was a hunt.
1번은 유치원생 수준은 아니고 대학생 수준이지만 직역에 속한다. 잘못한 것은 없지만 재미를 전달하기에는 평범하다. 이 정도만 갖고는 영미권 플랫폼에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번은 의역인데 그 특징은 '그림자조차도 빠져나갈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집어넣었다는 데 있다. 천라지망의 의미를 잘 함축했다. 솔직히 이 정도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3번은 아예 리라이팅이다. 주어를 사람이 아닌 드론으로 바꿔치기했다. 영어에서는 이게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천라지망을 아예 배제시키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물'이라는 단어를 살렸다. 이것 말고도 또 다른 버전 2개를 더 제시했다.
나는 이걸 보면서.. 오! 해외진출? 이 정도면 가능성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1번을 못써먹는다고 했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1번을 쓰는 것이 맞는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상황에 따라 1,2,3을 골고루 쓰면 된다. 나는 2,3을 만들어내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인데.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AI의 실력이 늘수록 점점 더 무서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분량 관계상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4,5번도 있었는데 그것들도 쓸만했다. 대안은 넘쳐난다.
고유명사를 신조어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별도의 회차를 배분하여 포스팅할 계획이다. 그것도 다룰 내용이 많다.
2차 테스트 : 문장 리라이팅
위 사례는 천라지망이라는 단어 때문에 만들어 본 것이었는데, 이제 단어가 아닌 문장의 맥락 수준에서 리라이팅 실력을 한번 살펴보자. 제시문은 필자의 단편 습작 중에서 한 단락을 떼어냈다.
[제시문] 시밀리움을 시켜서 회장님 머릿속 심연의 끝자락까지도 뒤질 거야. 혹시 모르잖아. 증거를 잡아낼 수 있을지.
1,기계번역식 : “I’ll make Similium dig through the deepest corners of the chairman’s mind. Who knows, maybe we’ll find some evidence.”
2.콘셉트 리라이팅 : “Similium will dive into the chairman’s mental abyss. Even the fragments he didn’t mean to think—if there’s truth buried in there, it’ll find it.”
챗GPT의 의역 실력은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쓸만하다. 그 외에도 한영번역을 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의 부수적인 일들을 도와주겠다고 한다. 연재 회차별 전체 단위의 감수, 스토리 흐름 점검뿐만 아니라 플랫폼에 올릴 작품 소개글과 작가 소개글, 영문 제목 브랜딩 및 부제목 라벨링, 독자 이탈방지 설계 뭐 이런 것까지 해준다고 하니. 사실 이런 것들은 절대 부수적인 일로 평가절하하면 안 된다. 정규 출판사라면 사람 써서 하는 일이다.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까지도 녀석이 도와준다고 하니 나야 뭐 고마울 따름이다.
이까지 살펴본 뒤 나는 녀석과 함께 해외진출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한번 가보자. 로얄로드!
다음 주에는 전형적인 동양 콘텐츠를 서양화시키는 방법 및 문제점들 소개할 계획이다. 한국작가가 서양에 진출한다면 동양적인 콘텐츠를 들고나가는 것이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걸 실제로 해 보면 고유명사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김치' 같은 것은 그대로 음차 하면 된다. 그러나 위에서 사례로 들었던 '천라지망'이라면? 위 사례에서는 의역으로 넘어갔지만 만일 천라지망이 책의 제목 정도에 해당되는 핵심 용어라면 어떻게 영역할 텐가? 그래서 일정 부분 신조어를 만드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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