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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므네 Jun 25. 2023

어릴 적 노트의 테이프로 밀봉한 페이지를 열어보았다.

‘나 같은 사람을 한 명만 만나고 싶다.‘

너무 일찍 일어나 버렸다. 시계를 보니 2시쯤.

어제 너무 피곤해서 화장도 못 지우고 일찍 잠들어 버렸다. 일어나서 화장을 지우고, 식탁을 치웠다. 기상 인증을 하고 인스타 스토리도 올리고. PDS 단톡방에도 오늘 첫 번째 아침 인사를 남겼다. 아침엔 일찍 일어날수록 좋다. 어제는 하루 종일 바쁘고, 머리에 떠오르는 많은 글감을 메모할 시간조차 없다고 느껴졌는데, 오늘은 모두 적을 수 있을 것처럼 시간이 넉넉하게 느껴진다. 밤을 아쉬워하지 말고, 일찍 일어날 것.


너무 일찍이긴 하지만.




얼마 전, 어릴 적에 쓰던 노트를 보게 되었다. 스프링이 달린 열 권이 넘는 노트들. 주로 그림이나 콘티를 그리고 가끔 글도 썼다. 노트를 재밌게 구경하다 테두리 3면을 모두 테이프로 밀봉한 페이지를 발견했다. 야한 거 아니니(앞의 두 페이지가 여성 누드 드로잉이었다.) 절대로 뜯지 말라며 무시무시한 저주의 글을 써놓았다. ‘왜 이런 걸 해놓았지?’ 피식 웃었는데 대체 어떤 비밀이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미래긴 해도 나 자신이니까 괜찮겠지…’라며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뜯었다. 다행히 내가 처음 테이프를 뜯은 사람 같았다.

테이프가 다 녹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쓴 주황색 글씨.



나는 시험을 앞둔 고1이었고, 공부는 안 하고 감동적인 만화를 읽고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어딘가 둥실 뜬 마음을 마구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딱 맞게 글로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해했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있었다.


‘나 같은 사람을 한 명만 만나고 싶다. 세상에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연애에 관심이 많을 때라 그런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게 꼭 그 말이 아니란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내가 어딘가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상처와 약함, 두려움과 불안을 말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나는 솔직한 내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진짜 나를 내보였을 때 전혀 이해받지 못하면 내 존재의 부정당할 것 같아 두려웠다. 온전한 이해를 받지 못한 마음은 더욱 감추게 되었다. 너무 취약해서 취약해질 수 없었다.




자꾸 영화 <트롤 2>의 한 캐릭터가 생각난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는 대걸레 자루에 기린처럼 목과 다리가 긴. 그는 자라오면서 자신과 닮은 트롤을 보지 못했다. 그는 생각한다. ‘왜 나 혼자 다르지? 나처럼 생긴 트롤도 있을까? 찾고 싶어.’ 그래서 자신과 닮은 트롤을 찾아 나섰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드디어 찾게 된다. 머리는 대걸레 자루에 기린처럼 생긴, 자신과 꼭 닮은 트롤들이 사는 마을을.


이 영화는 트롤들이 음악 장르를 말한다. 거의 모든 장르가 나온다. 팝, 락, 클래식, 테크노, 재즈, 컨트리, 요들, 심지어 K-팝 트롤도 있다. (화려한 옷을 입고 군무를 춘다.)


그의 장르는 ‘펑크’였다. 다른 장르에 비해 즐기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자신과 닮은 트롤과 가족들을(알고 보니 펑크 트롤 왕자였음.ㅎㅎ) 결국 찾은 그는 “정말 있었어!”라며 기뻐한다. 그는 다른 펑크 트롤들과 함께 펑크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초록 모자가 그 캐릭터.




어제 첫째 봄이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공릉역에 가서 지완님의 <매일의 낱장들>전시에 다녀왔다. 지완님은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의 멤버. 단단하게 꾹꾹 눌러 그린 그의 그림과 글, 사진은 그를 닮았다. 진중하고 섬세한 그의 전시를 보며 우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가다가 지친 봄이.



의미있는 사진들.


과정을 하나하나 전시한 디테일이 좋았다.


실제 그가 매일 일기를 쓴 책상.


자기가 쓰고 싶은 문장을 라벨지로 뽑아 붙일 수 있게 해놓음.



만들기 전에 대화를 나누었던 영화 <에.에.올>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




밑미 소식지 워크숍 때 지완님을 처음 만났다. 유일한 남자지만 너무도 편안히 섞여있는 지완님은 흔치 않아 보였다. 그가 <일간지완> 책을 살짝 보여줬는데, 글마다 너무 공감되어서 놀랐다. 나는 궁금했다. 그도 혹시 어릴 때 나같이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모닥불 앞에서 그에게 자꾸 질문을 했었다.


지완님 전시를 다 보고 돌아갈 때 지완님이 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제가 워크숍 때 자라면서 지완님이랑 비슷한 사람이 잘 없지 않았냐고 물어봤잖아요. 제가 요즘 어릴 때 쓴 노트를 봤는데 ‘나 같은 사람을 한 명만 만나고 싶다.’고 쓰여있더라고요. 지완님은 남자여서 더 만나기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맞아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있는 모임을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그렇죠? 자라면서 주변에 없어서 그랬지. 찾아보니 겁나 많았어!”

둘 다 빵 터지며 웃었다.


<일간지완> 책과 멀리서 왔다고 주신 선물들.


내가 다시 시작된 책상. 지완님이 약간 점보듯이 질문하며 책 첫 장에 나를 나타내는 물건을 그려주셨다.


글 쓰면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지금 있는 글쓰기 리추얼 방의 글만 봐도 나 같은 사람이 엄청 많다. 다른 사람이 내 생각을 적어놓아서 신기하다. 모든 글이 공감 가고, 공감받는다.


우리의 장르는 ‘펑크’였다. 많지 않지만 분명히 있으며,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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