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므네 Aug 08. 2023

용종 없는 여자

자궁 용종 제거 수술 병상일지

대학병원 진료실. 여자 의사 선생님이 내 검사결과를 보며 약간 높은 톤으로 입을 떼었다.


“아…...”


나도 모르게 의사 선생님 목소리 톤과 뉘앙스에 엄청 집중하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 생각하면서 진료실에 들어왔지만 “아…” 한마디에 온갖 상상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드라마에서 보던 심각한 장면이 나올까 봐.


“산부인과에서 잘 보셨네요. 용종 맞네요. 어느 산부인과였지? 0000. 여기가 요즘 잘 보시네?”


산부인과 칭찬이었다. 좋은 건가?


“크기는 산부인과에서 잰 것보다 커요. 1.8이 아니라 2.4센티예요. 자궁내막에 있는 것 치고는 꽤 많이 커서 떼어내는 게 맞아요. 근종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네요. 이건 놔둬도 되고.”


수술은 1박 2일 말씀하셨는데 내가 혹시 당일로는 안되냐고 여쭤보니 아침 일찍 와서 오후에 수술하고 저녁에 퇴원할 수 있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용종이 내 몸에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난 용종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화를 내면, 용종도 같이 붉고 빳빳해지는 것 같았다. 용종에 근육이 있을까? 아니면 점처럼 그냥 살 같을까? 얼마 전까지 나에게 용종이란 게 있는 지도 몰랐는데 이제 용종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은 내가 인식하는 만큼만 산다. 있다, 없다는 사실 내가 그 존재를 인식하느냐에 있는 것 같다.  


며칠 뒤면 나는 다시 용종이 없는 사람이 된다. 원래부터 모르면 괜찮지만 마치 용종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직 검사해서 용종의 안부를 들으면 내 기분은 어떨까. 안도할까. 기쁠까. 씁쓸할까.




입원 수속이 8시라는데 8시 반이 되어서야 오픈했다. 기다리는 동안 그림을 그렸다. 사실 책과 노트, 아이 패드, 키보드 따위를 바리바리 싸왔다.


첫 임신 때 아이가 심장이 안 뛴다 했을 때 수술하기 싫었다. 비장하게 강남역 지하상가를 몇 바퀴나 돌아서 자연 배출했었다. 그리고 아이 둘을 자연 분만했다. 수술은 처음이다.


병실에 올라갔다. 2인실이다. 창가자리가 아니라 조금 아쉬웠지만, 나 혼자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들었다.

화장을 지워야 한대서 지하 편의점에 내려가 폼클렌징을 사 왔다. 병원에 있으면 더 아파 보이는 건 노메이크업 때문일지도.


배가 아프고 춥다. 아까 질을 부드럽게 하는 약을 넣으면서 배가 생리통처럼 아프고 오한이 들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이다. 몸이 덜덜 떨린다. 예상했던 아픔이어도 아픈 건 아프다. 그래도 걱정은 안 된다. 아파도 걱정 없을 수 있다는 건 좋구나.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아까는 아침에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자리에 눕는 게 이상하게 느껴져서 눕지 않았는데, 아파지니 저절로 눕고 웅크리게 된다.




수술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 보고 싶었던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봤다. 티모시 샬라메가 우디 알렌화 되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볼 때도 느꼈는데 감독 자신을 미화된 남주의 모습으로 투영하는 것 같다. 재즈와 독백이 좋다. 영화의 좋은 점은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이든 어디든.


“김은혜 님, 수술 들어가실게요. 가글 하시고 소변보시고 팬티 벗고 나오실게요. ”


화장실에 가면서 <레이니 데이 인 뉴욕> ost를 흥얼거렸다. 보길 잘했다. 수술받을 때 재즈 bgm을 깔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내 자리. 창가 자리 빛이 조금 부러웠다.


병실 문 앞에 이동 침대에 누웠다. 머리에 샤워캡 같은 걸 씌워 주셨다. 방금까지 가짜 환자 느낌이었는데 이제 진짜 환자가 된 것 같다. 안경을 벗고 나니 천장이 뿌옇게 보였다. 이동침대가 움직이자 천장이 움직였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내가 자궁에서 용종을 떼는 환자가 나오는 영화를 만든다면 이 뿌연 천장 신을 넣어야지.


안내표지판에 있는 글씨를 읽었다. 난 눈이 나빠 안경이나 렌즈 없으면 아무것도 못 본다고 생각했는데, 큰 글씨는 읽을 수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 얼굴은 선명하게 보인다. 부족하다 치부했던 것도 위기 때는 쓸모가 있구나.




수술실 문지방을 지날 때 대형 수영장 냄새가 났다. 수영장처럼 습기는 없었다. 차갑고 사람이 많았다. 남자 의사가 많아 좀 부끄러웠다. 저분들은 이게 일이야.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앞에는 열풍기 같은 게 두 개 있었다. (안경이 없어서 여전히 뿌옇게 보였다.)

뭔가를 몸에 잔뜩 붙였다. 내 입 앞에 가스가 나오는 입마개를 들고 남자 의사가 말했다.


“마취 가스예요. 숨 들이마시세요. 링거바늘로 항생제가 들어갈 건데 좀 아플 거예요. “


숨을 흠흠 들이마시는데 진짜 왼손이 아파온다. 그래도 난 이런 고통을 잘 참는다. 애도 둘이나 낳았으니까.


“김은혜 님, 수술 다 끝났습니다.”


잠든 지도 몰랐다. 수면마취가 이런 거구나. 이제야 비로소 이동식 침대가 어울리는 환자가 되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 목소리가 들렸다. (안경이 없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수술은 잘 됐고 용종 같아요. 나쁜 건 아닌 거 같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다행이다. 근데 으아, 너무 아프다. 생리통을 넘어서 출산할 때 허리 진통 같다.  진통제 수액 맞아서 좀 덜 아팠지만 그래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아픈 걸 잊으려고 눈을 감고 졸았다. 자다 깨고 자다 깼다. 꿈인지 현실인지. 이거 첫째 출산 때 같은데.  


남편이 첫째 데리고 병원에 데리러 왔는데 퇴원을 안 시켜준다. 8시에 소독하며 위험한 출혈이 없는지 확인하고 8시 반 넘어 퇴원했다. 수납 시간이 마감되어서 응급실 쪽에 가서 수납해야 한다고 했다. 몸도 아프고 바리바리 싸 온 짐이 엄청 무겁다. 아까 퇴원 안내 문구에 무거운 짐을 들지 마시오.라는 말이 떠오른다. 병원에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묻는다.


“어떻게 오셨어요?”

“오늘 수술했고, 수납하려고요.”


비싼 병원비를 4개월 할부로 수납했다. 남편과 봄이를 기다리며 병원로비 의자에 누웠다. 사람이 힘들면 이렇게 시루떡처럼 실구러지는구나. 누워서 글을 썼다.


차를 타고 집에 와서 밤 열 시 반에 삼계죽을 먹었다. 수면마취를 하면 위장도 잠이 든다고 죽을 먹으라 했다. 위장은 죽 정도는 자면서도 소화시킬 수 있다니 대단하다.


나는 이제 용종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붓끝으로 ‘두둠칫’ 춤을 추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