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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므네 Sep 08. 2023

허탕의 즐거움

계획대로 되어도, 안되어도 좋다.

아침부터 뛰어다녔다. 9시 38분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주차가 영 찜찜했지만 괜찮겠지 했다. 다섯 정거장쯤 갔을 때 전화가 왔다.


“여기다 차대시면 안 됩니다. 차 빼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


바로 내려서 돌아가는 차를 탔다. 그래도 서울 가기 전에 금방 전화 와서 다행이다. 양평역에서 열심히 뛰었다. 주차 단속 아저씨가 인상이 좋았다. 웃으며 여기 대면 안된다고 했다. 다행히 차엔 경고장만 있고 딱지를 안 뗐다.


차를 옮겨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출발한다. 아까 못 봤던 파란 꽃과 덩굴에 달린 호박을 봤다. 아까 본 개똥도.

챙이 짧은 연보라색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다. 문이 닫히자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26분 차인데 탈 수 있으려나 몰라.”

“저도 그거 타려고요.”

“아, 그래요? 아니 저번에는 내 앞에서 바로 문이 닫혀서 얼마나 아깝던지 몰라. “

“그게 제일 아쉽죠. 지금 2분 남아서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래, 열심히 뛰어봐야겠네.”


목적이 같은 러닝 메이트가 생겼다. 같이 달렸다. 에스컬레이터를 뛰듯이 내려갔는데 지하철이 떠나는 게 보였다.


“아…”


어떤 할아버지가 내 뒤에 내려오시더니 말했다.


“떠났쥬?”

“네, 방금 차가 떠나는 걸 봤어요.”


아내 분 같은 할머니도 내려오셨다.


“놓쳤어요?”

“네…”

“아유…26분 차인데.”


열차 전광판엔 10:27이라 떠있었다. 열차 시간개념이 아주 칼 같다.

뒤에서 노부부가 3분밖에 안 늦게 나왔는데 벌써 떠났네 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왔더니,

아까 그 아주머니가 인터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떠난 걸 알고 아예 내려오지도 않은 것 같았다. 경험으로 얻은 지혜.


지나가던 역무원에게 “차를 놓쳐서 나갔다 다시 들어오려고요. “라고 ‘우리’처럼 말하고 아주머니, 나, 노부부가 밖으로 나왔다. 아까 못 간 화장실에 천천히 다녀와서 편의점에서 흑임자 우유를 샀다. 대기실에서 흑임자 우유를 마셨다. 좀 달지만 맛있다.


인상 좋은 주차 단속 아저씨. 파란 꽃. 호박덩굴. 같은 기차를 놓친 동지들. 허탕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준다. 계획대로 되어도, 안되어도 좋다. 또 다른 허탕을 만날 수도 있지만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을 지니고 53분 지하철을 타러 조금 일찍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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