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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읍 종달리 강인화 해녀의 '삶'

빛나는 해녀, 강인화의 이야기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 살고 있는 구좌읍 종달리 강인화라고 합니다.

따뜻한 햇살이 비추던 4월 오후, 화상 회의를 통해 강인화 해녀를 만났다. 그녀는 제주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이기도, 극장식 레스토랑 '해녀의 부엌'에서 제주 해산물을 소개하는 공연인이기도 하다. 화상으로 만났지만, 그녀의 밝은 기운은 화면을 넘어서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구좌읍 종달리에서 펼쳐진 강인화 해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다.




해녀, 강인화


구좌읍 종달리에서 50년 넘게 물질을 하고 있는 강인화 해녀. 그녀는 종달 어촌계 잠수회장을 맡았을 만큼 리더십과 실력을 겸비하고 있다. 강인화가 전하는 해녀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물질을 하러 바다에 들어가는 강인화 해녀


해녀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저는 1952년에 태어나 지금은 일흔 살이 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대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제주도의 여자들은 다 잠수를 배웠답니다. 처음에는 잠수를 하기가 망설여졌었어요. 농촌의 자식이라 부모님과 밭일도 했고, 기술을 배워보려고도 했죠. 하지만 나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결국 어머니를 따라 잠수를 배웠고, 지금까지도 물질을 하고 있답니다.


처음 물질을 했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어요?

우리가 수경을 쓰고 작업을 하잖아요? 처음 물질을 할 때 그 수경을 쓰고 잠수를 하니 바다의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아, 너무 신기하고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해녀 분들은 배려하며 함께 일하는 '공동체 문화'로 잘 알려져 있어요. 동료 해녀 분들과 어떤 방식으로 일해오셨는지 궁금해요.

우리 해녀들은 실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답니다. 같은 구역 안에서도 상군은 깊은 곳, 하군은 조금 얕은 곳에서 작업을 하죠. 상군이 물건을 많이 잡은 날에는 하군들에게 조금 나눠주기도, 격려를 하기도 합니다. 배려도 하지만 경쟁도 해요. 저도 잘하는 상군인데, 다른 상군들보다 못 잡은 날에는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그런 마음을 먹고 더 노력을 한답니다. 무엇보다 저희 종달 어촌계 해녀들은 서로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에도 “우리 서로 이렇게 하지 말고, 좋게 하자.”라며 단합을 하죠. 그리고 함께 배를 타고 나가서 물질을 한답니다.


배를 타고 물질을 준비하는 종달 어촌계 해녀들


해녀들만의 규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바다는 육지와 참 달라요. 바다에 들어가면 위험한 일들이 많아 항상 조심하죠. 예를 들어, 돌고래 떼가 들이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긴장을 하고, “배알로, 배알로!”라고 외칩니다. "배알로"는 우리를 해치지 말고 배 아래로 지나가라는 뜻이죠. 그렇게 외치고 나면 돌고래들이 배 밑으로 ‘사악’ 지나가는 걸 볼 수 있어요. 또, 우리는 ‘물때’에 따라 잠수를 한답니다. 한 물, 두 물, 서 물에는 물이 아주 잔잔해서 해녀들이 작업하기가 좋아요. 하지만 다섯 물부터 여덟 물까지는 물발이 세져서 작업하기 아주 위험해진답니다. 해녀들은 매일 물때를 보고 물질을 할지 말지, 몇 시까지 할지를 결정한답니다.


과거에 해녀 분들께서 제주를 떠나 원정 물질을 하셨었다고 알고 있어요.

제주도에는 옛날부터 큰 수입이 없었어요. 농사를 지어도, 바다에서도 큰 수입이 안 되었죠. 원정 물질에 나가면 제주도에서보다는 돈벌이가 되었어요. 저도 스물한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거제에 가서 원정 물질을 했죠. 결혼을 한 후에는 자식을 데리고 연대도에 가기도 했답니다.


과거의 해녀복은 아주 얇아 보온이 거의 안 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전통 해녀복을 입고 작업하신 적이 있으세요?

네, 과거에 우리는 아주 얇은 해녀복을 입었어요. 여름에는 괜찮았지만, 겨울에는 물이 너무 차가워서 떨며 고통스럽게 일했죠. 그 옷을 입고서는 오랫동안 작업을 할 수가 없었어요. 20~30분 정도 작업을 하고 나면 너무 추워서 한 시간 반 동안은 배에 올라와서 불을 쫴야 했답니다. 이제는 입으면 절대 춥지 않은 고무 잠수복이 나와서 한 번에 4~5시간씩 물질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제주 해녀들이 입던 전통 해녀복


고무 잠수복이 나온 후에는 물질 작업이 조금 더 편해지셨겠어요.

사실 힘은 지금이 더 들어요. 물질을 더 오래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요. 물속에 20분 정도만 있을 때에는 추워서 힘들었지, 물질하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4~5시간 동안 물질을 하고 나면 완전히 힘이 빠진답니다. 우리가 이 무거운 잠수복을 입고 일주일을 작업하고 나면 3kg 이상은 쭉 빠져요. 작업하고 집에 오면 누가 밥이라도 제 입에 떠줬으면 하는 심정일만큼, 그만큼 견디기 힘들답니다.


해녀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쉴 수 있으신가요?

집에 가족들이 있으면 또 힘들어요. 음식도 차려놔야지, 빨래도 해야지, 가삿일이며 밭일이며 아주 반복적으로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사람이 지칠 대로 지치죠.


이렇게 해녀라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데, 물질을 벌써 50년 넘게 하고 계세요. 물질을 오래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받으셨나요?

어르신들이 항상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다에 가면 욕심내지 마랑. 숨 잇실 때 항상 나오고 물건에 욕심내면 절대 안 된다.” 그래서 그거를 항상 머릿속에 두어 저의 숨에 맞게만 물건을 갖고 올라오죠. 이렇게 어르신들께 배운 것이 지금까지도 물질을 하는 힘이 됩니다.


테왁을 던져 바다에 들어가는 강인화 해녀


작업을 하다 숨이 차서 위험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네, 저도 욕심을 내다 큰 코 다칠 뻔한 적이 있어요. 예전에 바다에서 전복을 뜯다가, 여기에 전복이 보여 뜯는데 저 옆에 전복이 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전복까지 뜯다가 물 밑에서 힘이 다 되어버렸어요. 정신없이 물 위로 올라왔을 때, 테왁*은 저쪽에 보였는데 세상이 그만 캄캄해져 버렸답니다. 그래서 “하, 나가 저 테왁까지는 가야 내가 살아나는데. 이래서는 절대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캄캄한 세상에서 겨우겨우 테왁을 잡아내고 배로 갔습니다. 그 후로부터는 “절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라고 깨닫고 물 밑에 별 게 있어도 딱 가질 만큼만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테왁: 해녀 전용 튜브이자 부표이다.


앞으로 해녀 일을 해나가실 마음가짐이 궁금해요.

전에는 제 자신이 해녀라는 게 조금은 부끄럽고, 비참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해녀를 하다 보니 유네스코에도 등재가 되었고, 또 해녀를 하다 보니 해녀의 부엌에도 제가 참여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진짜 좋은 기분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왕 물질을 배웠으니까 앞으로도 잠수를 악착같이 하고, 기분 좋게 바다에 들어가서 망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가 한 만치 그렇게 할 겁니다.




해녀의 부엌, 강인화


3년 전, 강인화 해녀는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극장식 레스토랑, '해녀의 부엌'과 함께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였다. 이 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담은 공연을 선보이기도 하고, 관객에게 제주 해산물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종달 해녀들과 청년 예술인들이 함께 제주 해산물의 가치를 알리는 해녀의 부엌. 이 곳에서의 강인화의 삶은 어떤 모습일지 들여다보았다.


뿔소라에 대해 설명하는 강인화 해녀와 김하원 대표 (제공: 톱클래스)


해녀의 부엌을 만나게 된 계기, 그리고 참여를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요.

해녀의 부엌 대표 하원이와는 같은 마을 이웃이었어요. 아주 아기 때부터 봤었답니다. 또 제가 종달 어촌계 잠수회장을 했어서 하원이가 제가 하는 일들을 많이 봤죠. 처음에 하원이가 해녀의 부엌에 들어오라고 했을 때는 제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하원이가 “이모가 해야 됩니다. 이모가 와서 우리를 조금 도와주세요.” 하는 거예요. 그러는 하원이를 보니 "나 같은 사람한테 이모라고 하면서 이렇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한 번 해봐야지!"라는 마음이 들어 해녀의 부엌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왕 해녀의 부엌에 들어왔으니까 힘껏 잘해보자." 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지금까지도 잘해오고 있습니다.


해녀의 부엌의 음식을 만드는 데에도 참여를 하셨나요?

네, 해녀의 부엌에서 나오는 군소 무침, 우뭇가사리 무침, 뿔소라 구이 같은 음식들은 모두 해녀들이 집에서도 많이 해 먹는 음식입니다. 다 잠수*들이 집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 잠수들이 직접 요리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해녀의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은 ‘우리가 바라는 음식’입니다. 더 바랄 게 없죠.

*잠수: 해녀를 의미한다.


함께 웃고 있는 해녀의 부엌 소속 해녀들과 청년 예술인들. 강인화 해녀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다. (제공: 조선일보)

 

해녀의 부엌의 청년 예술가 분들은 해녀님께 어떤 의미를 가지시나요?

제가 나이가 이렇게 들었는데도 해녀의 부엌에 가면 이모, 이모 하면서 참 잘해줘요. "아유, 내가 이 나이에, 그래도 해녀인데 이제 와서 이 배우들과 사이좋게 웃기도 잘 웃고 하는구나." 해요. 여자 배우들, 근무하시는 남자분들 모두 엄청나게 우리한테 잘해줘서 아주 만족하죠. 더 이상 그런 만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친구 같은 사이입니다. 아주 재미지죠.


해녀의 부엌과 함께 하면서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학교를 못 나왔지만 공부를 저 스스로 했고, 또 책도 엄청나게 많이 봤습니다. 그렇지만 결혼을 하고 너무 힘들게 살다 보니 그런 것들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죠. 지금은 관객들 앞에서 이야기도 하고 설명도 할 수 있어요. 또 젊은 배우들이나 근무하는 사람들과 희한하게 사이가 정말 좋거든요. 그럴 때 “아, 내가 책을 많이 보니 이런 자리에 와서도 서슴없이, 떨림 없이 하고 있구나. 그리고 내가 책을 많이 봐서 젊은 분들하고도 대화도 꺼림 없이 할 수가 있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답니다.




꿈, 강인화


해녀로서의 평생의 삶을 살아온 강인화. 그녀에게도 해녀가 아닌 다른 꿈이 있지는 않았을까, 궁금한 마음에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았다.


해녀가 아닌 꿈을 가진 적도 있으신가요?

저는 변호인이 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한이 맺혔답니다. 우리 가족에는 저 밑에 동생들이 줄줄이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 그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학교에 제대로 못 다녔거든요. 그래도 공부는 곧잘 해서 우수미양가 중에 미도 안 받고, 우, 수는 했어요. 학급 급장과 라이벌이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저보고, “인화는 학교를 계속 다니면 일등 할 텐데.” 그러셨었죠. 결국 초등학교만 나오고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그 후에도 스스로 책을 사서 중학교 공부까지는 확실나게 했어요. 삼천자문 책을 사다가 전부 외우다시피 했어요. 영어도 어디 가서 광고는 볼 줄 알고, 외국에 가도 영어로 다 합니다. 항상 저는 “이 정도는 배워야지.” 그런 마음 가짐을 딱 가지고 공부를 했답니다. 저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죽어라고 공부를 해 변호인이 되어서 어려우신 분들께 무료로 변호를 해드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멀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삶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간 것은 그리워 하느니라.


인터뷰가 끝날 무렵, 강인화 해녀는 평생 가슴에 간직해 온 푸쉬킨의 ‘삶’을 읊었다. "이 시를 지금도 깨달으며 읽고 또 읽습니다. 한번 읽고 머리에 다 안 들어와서 두 번 읽고, 또 세 번 읽고, 지금도 읽는 중입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해녀의 부엌 공연을 마칠 때에도 이 시를 관객 앞에서 읊는다. 푸쉬킨의 말마따나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녀로서의 자신이 부끄러웠던 서러운 시간을 견뎌내고, 해녀의 가치를 존중하는 이들과 웃을 수 있는 현재에 감사하는 강인화였다.


해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자연, 그리고 동료 해녀들과 공존하는 지혜로움을 보여준 강인화 해녀. 그녀는 이제 해녀의 부엌의 청년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는 관객들과 진심 어린 소통을 통해 관계를 맺어나가고 있다. 종달리의 수많은 생명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강인화의 삶은 지금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해녀의 부엌은 제주 해산물을 대중에게 판매하고, 해녀들의 삶을 담은 공연과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로 차린 식사를 결합한 극장식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 수출 의존도가 높아 가치가 하락한 제주 해산물의 국내 소비시장을 창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haenyeokitchen.com

인스타그램: @haenyeo_kitchen



Article by

키뮤매거진 이현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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