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여행 중 만난 영국인 윌리엄 이야기
윌리엄을 처음 만난 건 새벽사원에서 왓포 방향으로 돌아가는 크로스 보트 안이었다. 기분 좋게 나 홀로 투어를 마쳤지만 집에서 멀어서 자주 나오기 힘든 구도시까지 나오고도 다음 계획이 없어 하릴없이 보트에 올랐던 그때,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190cm는 훌쩍 넘을 것 같은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배낭이 왠지 어색해 괜히 웃음이 났다. 그는 가만히 내 얼굴을 보더니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긍정의 표현으로 찡긋 웃어 보였더니 그는 정확히 이렇게 발음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보트가 강 건너편을 건너는 3분여 동안 나는 그에 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영국 출신은 그는 우리가 만나기 전날, 그가 오랫동안 일해온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일이 끝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태국 방콕을 찾았다. 방콕 여행은 이번이 꼭 3번째였다. 그는 동남아의 문화와 음식 그리고 풍경들을 사랑한다. 한국에는 2004년쯤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서울은 꽤 매력적인 도시였지만 다음에 다시 한국에 가게 된다면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했다.
보트가 선착장에 도착했고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며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 홀로 남은 나는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다가 문득 새벽사원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명관이라는 조언을 떠올렸다. 나는 바로 새벽사원이 잘 보이는 카페들이 즐비한 거리로 향했다. 그런데 나보다 보폭도 넓고 걸음도 빠른 윌리엄 또한 그 카페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원래 왓포 근처에서 그의 태국인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 난감해진 터였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선셋을 보려 한다고 답했다. 그는 괜찮다면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하루 종일 혼자 다녀 꽤나 심심했던 찰나 내겐 기분 좋은 간청이었다.
은은하게 노란빛으로 빛나는 새벽사원과 짜오라프야 강의 경치를 보기 위한 사람들로 이미 카페는 만석이었다. 그중에 딱 한 테이블, 예약석이라고 적힌 자리를 제외하고. 이미 1달, 아니 길게는 3달 전부터 예약이 완료된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꽤 담담한 표정으로 뒤돌아서려는 찰나 윌리엄이 카페의 주인을 찾더니 그를 발견하곤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자리가 비어있으니 이 자리의 주인이 오기 전까지만 앉아있으면 안 될까요?” 영어에 능숙한 주인장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원래는 절대 안 되는데, 너니까 허락할게.” 이런 딜에 꽤나 능숙한 윌리엄 덕분에 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야경을 보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싱하(태국 맥주)를 마시며 강 건너편 새벽사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산 정상에 올랐던 사람처럼 나는 뿌듯해졌다. 그렇게 황홀한 풍경 속에서 잠시 목을 축인 후 우리는 다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콕에 장기간 머무르는 나와 달리 윌리엄은 당분간 태국, 캄보디아 등 동남아 지역을 둘러볼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가장 좋아하는 건 태국이기 때문에 모든 여행을 마친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며칠 더 체류한 후 영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그가 태국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곳의 냄새 때문이었다. 배수 시설이 좋지 않은 태국의 하수구 냄새를 좋아할 리는 없고, 향신료 향을 뜻하는 건가 해서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답했다. “그 냄새란 모든 것을 포함해.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그 방콕 냄새 말이야. 그게 자주 그리웠어.” 잠시 깊어진 그의 얼굴 주름에서 그동안 그가 삶의 전선에서 느꼈을 고단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는 그의 작은 배낭을 뒤적이더니 노트 한 권을 꺼냈다. 다 낡은 노트는 작지만 두꺼워 매우 단단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안에는 그동안 그가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각종 입장권들, 비행기 표,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들의 사진 등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책을 꼭 열어보고 싶었다. 양해를 구하고 그 노트에 적힌 내용들을 눈으로 훑고 나서야 나는 그가 말한, 그토록 그리웠던 이곳의 '냄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윌리엄에게 방콕, 태국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찰나가 아니었다. 여행하며 만난 친구들, 대화, 그가 느낀 감정들이 그 노트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 그는 언제든지 그곳을 기억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는 건 그것을 애써 사랑했던 이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기에.
이윽고 해가 저물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우리가 잠시 빌린 테이블의 주인이 왔다. 아쉬운 마음에 저 멀리 보이는 새벽사원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나는 한낮에 들은 새벽사원의 풍경소리를 강 건너편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추억하고 언제든 그 안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