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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례 Jul 12. 2020

실패의 크기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나의 삶이 좋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이후 전공을 무려 세 번이나 바꿨다. 심지어 지금은 마지막 전공과 전혀 무관한 일로 6년째 밥벌이 중이다. 면접이라든지 소개팅과 같은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나의 이력을 소개해야 할 땐 더 난감하다. 과거의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내가 되었다고 잘 엮어보고 싶지만 어째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 부끄러운 성적표를 품에 안은 고등학생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고 등에서 굵은 땀이 흘렀다.    


내가 기억하는 첫 실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치른 리코더 시험이다. 그때부터 승부욕이 남달랐던 건지 매일 밤 피리소리로 온 가족을 괴롭혔건만 덩달아 힘들었을 이웃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냥 다 망쳤다. 무대 공포증이 문제였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구멍을 막기는커녕 찾지도 못했고 당황하니 숨도 가빴다. 끝까지 연주를 마치긴 했지만 이탈음처럼 내 마음도 삐걱거렸다.


20년은 훌쩍 지난 이야기지만 아직도 그때가 생생한 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뒤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좌절감이 꽤 충격적이었던 게 아닐까. 그 이후에도 무대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 연습했지만 지금도 사람들 앞에 서야 할 때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느라 진땀을 빼긴 마찬가지다. 카메라 울렁증을 극복했다던 유명 MC는 도대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경이다.


어느 영화의 명대사처럼 인생은 계획이 다 있어도 그 영화의 전개처럼 썩 순탄치 않다. 예상치 못하게, 어쩔 수 없이 일과 약속이 쉽게 어그러졌다. 사랑도 우정도 꿈도 인생의 부분들인지라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패가 반복되니 좌절과 마주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꺾였다. 붙들어야 할 희망은 오히려 고문이 됐다. 때로는 실패가 곧 나 자신이 되기도 했다.


허나 숱한 실패와 실패를 통해 깨달은 것도 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실패한 순간에도 이를 피해 갈 순 없다는 것.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것도. 좌절은 자기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최상의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이젠 실패를 부끄러워하기보다 그때마다 지혜를 구하고 싶다. 넘어지지 않았다면 놓쳤을 뻔한, 넘어져야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래도 실패할 땐 단 한 번의 성공도 없었지만 지금까지 잘 버텨온 나를 스스로 대견스러워해야지. 실패의 크기는 나를 짓누르기엔 한없이 모자란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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