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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이산, 아픔을 딛고 왕이되다

정조이산만큼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 조선왕이 된 경우도 드물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된 이 후 피의 숙철을 하지 않았죠

대신 모두를 위한 나라, 조선을 만들기 위해 개혁정책을 실시합니다. 





영·정조 시대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이란 나라를 세우고 400년이란 시간이 흘러 조선역사상 가장 성숙한 문화를 이루었던 때이죠. 정조 시대에 이르러 우리의 문화적 풍토도 다양해지고 성숙해져서 중국에도 수출(단어가 이상하지만 ^^)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중국에 다녀가면서 우리 것도 전해주고 가죠.


청국의 학자들이 조선에서 온 학자라고 해서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이분들이 쓴 글이나 학문이 상당하더라 말입니다. 그래서 대등한 입장에서 교류를 시작하죠.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조선사회도 개방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문화도 그만큼 성숙했기에 서로 교류가 가능했던 것도 있지만 사회가 전반적으로 개방적인 풍토로 바뀌고 있었으니까 예전보다 교류가 활발해졌죠.


그전에는 산림학파들이 조정의 정치를 좌지우지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정치적 의견이 다르면 산림학파의 거두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여쭤보는 게 상식이었죠.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치, 경제, 교육, 상업 등 분야의 중심이 서울에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청국으로의 여행이 활발해지면서 진보적인 지식인들(실학자라고 하지요)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을 탄생시키고 또 서양에서 들여온 종교, 학문 등을 조선으로 가져옵니다. 양반계층만 향유하던 문화를 이젠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에서도 향유하기 시작합니다. 사농공상, 뚜렷하게 나뉜 신분제도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하고요. 직업도 다양해집니다.


청론사류(靑論士類)(사림정치의 원칙에 입각한 학문정치 공론정치의 실천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을 일컬음)라고 하죠. 영조대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들은 특권세력을 배제하고 신진세력의 수용을 주장하며 정치개혁을 촉구했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은 청의 문물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자는 북학파에서 서양의 문물을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과 신분을 초월하여 교류했고 주자학 중심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상적 풍토를 조성했지요.



사도세자가 죽고 난 후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한 정조는 두 외척(정순왕후, 혜경궁 홍씨)세력을 제거하고 노론, 소론, 남인 층에서 골고루 관리를 등용하는가 하면 규장각을 세워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자들을 등용하고 초계문신제도를 도입하여 신진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죠. 이전 시대와 다른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검서관(檢書官)제도를 두어 양반이 아니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관료로 진출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인데요. 이 제도를 통해 박제가, 이덕무 등이 관리로 등용되었죠. 두 분은 연암 박지원-여러분 좋아하시죠?-과도 관련이 깊은 인물입니다.



역대 조선왕의 면모를 살펴보면 정조 임금처럼 복잡다단한 인물도 드문데 아마도 사회격변기에 조선의 중심에 있었던 왕인 만큼 다양하게 대처해야 했기에 그렇게 비치지 않았을까요? 인간이란 하나의 소우주입니다. 복잡한 존재지요, 그런 인간을 어떤 한 면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조선에 태어난 정조 이산, 그에 맞게 태몽도 용꿈이었다지요. 그의 태몽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꾸었다고 하지요. 혜경궁 홍씨가 임신하기 두세 달 전 용이 침실로 들어와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꿈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태몽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사도세자는 흰 비단에 용을 그려 벽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그는 손이 귀한 조선 왕실에서도 세자빈의 몸에서 태어난 적장자로 장차 왕이 되는 데 아무 거리낄 것 없이 왕실의 사랑과 보호 속에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의 인생에 어둠이 들이닥친 건 그의 나이 11세, 1762년입니다.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는 일이 발생하죠. 같은 해 2월에 이산은 좌참판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렀습니다. 왕실의 경사인 셈이죠. 하지만 새신랑 이산은 경사로운 해에 아버지를 잃습니다. 병사도 아니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건장했던 아버지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죠.



현대의 우리들은 영․정조 시대로부터 250여 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머릿속으로는 비극적인 일이란 걸 알아도 가슴으로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상상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시대로 들어가 상상을 해보세요. 한 나라의 세자가 그것도 왕세자라는 분이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만큼 좁은 뒤주에서 죽었다는 것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된 사람들은 정조 이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 정순왕후의 친정 오빠였던 김귀주, 고모인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파벌과 숙의 문씨 일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더러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던 아버지 영조. 따지고 보면 사도세자와 가장 가까워야 할 존재인 혈연이었습니다. 권력 앞에선 부자 관계도 여느 부자 관계 같을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겠죠.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이 후기로 오면서 왕권이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문이 속한 당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왕의 말에 순응하는 것보다 중요해지죠. 하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권력이 세력화되면서 당권이 왕권보다 앞서는 현상입니다. 당시 당의 권력이 왕권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는 것, 그 앞에서 한 나라의 세자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권이 강화되면서 왕이 독주하는 것을 견제하는 역할도 있었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가 균형을 이룰 때만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죠. 어느 한쪽에 힘이 집중되는 현상이 지속되면 힘의 균형이 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비극적인 사건이, 정조이산이라는 인물을 만나,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아픔을 가진 자들을 이해하고 조선을 기득권의 나라가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어야 겠다는 결심을 깊이하는 계기가 되어 줍니다. 인생에서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는 가, 또 어떻게 넘기는 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산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졸지에 죄인의 신분으로 추락하고,세손임에도 목숨 보존하는 것도 힘든 그러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의 세손 시절의 일기를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파옵니다.



나는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도 방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편안하게 옷을 법고 눕지도 못했다.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살펴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

나는 손안의 노리개와도 같다.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다.

김용심,『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47쪽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살펴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

세손은 노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를 알 필요가 없고 병조를 알 필요가 없다.

홍인한의 권세가 나라보다 더 대단하다.

임금과 세손은 손안의 물건이다.

임금을 만날 때도 몸을 구부리지 않고 신발 끄는 소리를 탁탁 내며 전혀 삼가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었다.

KBS 1TV ‘한국사 傳’, 무인정조대왕 중, 존현각일기 인용분


절망적인 상황 속에 아이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료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자리에 대한 소중함을 몰랐겠죠. 또 백성들의 아픔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왕족인데다 머리도 좋아 사람들이 다 자기 위해줘, 자칫 잘못하다 이상만 높고 현실은 볼 줄 모르는 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역사 속의 정조는 존재하지 않았겠죠.


그가 왕에 즉위한 후 죽기까지 치적을 살펴보면 정조 이산은 단순히 집권 세력을 약화시키고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 근세로 향하는 조선을 새 시대의 궤도 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산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으로 왕권이 충분히 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실패를 일으킬 확률이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오랜 세월을 두고 미래로 나아가는 조선의 길을 열어나갔습니다.



그는 세손 시절 스스로도 자신의 일을 매일 반성한다고 고백했을 만큼 ‘왜 왕이 되려고 하는가? 왕이 되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했을 겁니다. 존현각 일기에서도 밝혔듯 다 그만두고 죽고 싶었던 때에도 많았을 겁니다. 자신의 운명을 비관했던 때도 있었을 거고요. 사람의 진가는 어려운 때에 드러난다고 하죠. 정조 이산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은 결과 조선의 비극의 쇠사슬을 끊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결심합니다.


여러분, 한 나라가 태어나 세월이 흐르면, 자연즉 개혁을 해야 할 때가 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득권이 생기고, 그들에 기생하는 세력들이 생기면서 제대로 된 질서가 아닌 힘의 논리 그러니까 force 에 의한 논리로 나라가 운영되는 형태가 됩니다.


정조이산은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제대로된 세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이 되기 전까지 몸을 최대한 숙이고 죽음의 위협을 여러번 넘기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했을 상황이었죠. 그는, 어린 시절의 아픔을 통해 개혁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 결과 그는 조선 역대 왕 중 제일 많은 행행(거리로 나아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행차)을 해서 민원을 처리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에 가까기 다가간 만큼 기득권 (외척세력들) 의 미움을 받았기에 가장 많은 역모 사건을 겪었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왕과는 달랐습니다. 아니 애초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각의 크기를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복수로는 '악습'의 고리가 끓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피의 숙청을 하는 대신 그는, 규장각을 세우고 초계문신제도를 실시하고 신하를 직접 가르치면서 조선을 쇄신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그가 일생동안 일궈냈던 업적은 180도 되돌려지게 됩니다.




그의 시대에 이루지 못했던 개혁은....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역사는 늘 반복되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정조이산을 궁금해하고

제 블로그에 들어옵니다.


저는 역사에는 관심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속적으로 잘 나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고,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은

역사란 어느 위대한 한 사람만의 힘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 바뀌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 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지금 당장 내게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세월이 흐르면서 엄청난 지혜가 되어 제게 보답을 해 주는 것을

역사 공부를 하면서 느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변화를 뜻합니다.

변화라는 것은 기존의 익숙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두렵고 겁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이 길을 걸어가든 저 길을 걸어가든 그리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에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쪽은 놓으라 하고 다른 쪽을 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더 크게 생각해 봅시다.

이 세상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 운명체입니다. 서로를 비난 해봤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우리가 서로 짊어 져야 하니까요.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 양보하고

서로가 공생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지금 당장은 그 길이 내게 이익이 안 되는 것 처럼 보여도

종국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뿐만 아니라

이제는 지구환경문제도 생존을 위협할 만큼 심각한 수준입니다.

우리는 피해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받았을 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었을 것입니다.


변화에는 고통이 따르고 두렵기도 하지만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한민족 본래의 사상이었음을

후손이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런 시기에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이렇게 한류가 세상에 퍼지는 것을 보고, 사랑받는 것을 보고 있는 저는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나라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그 간의 역사를 통해 목숨을 내어 희생했던 조상님들의 덕이

있었기에 우리가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들에게 또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개혁이라고 하면 거창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작은 것에서 부터

내 삶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차를 타는 대신 걸어가는 것으로

휴지를 쓰던 것을 손수건으로 바꾸는 것으로

길을 지나면서 보이는 식물에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내 것을 하나 더 챙기려던 마음에서 에잇 하나 더 주자 하는 마음으로 변화 하는 것으로

정조 이산이 꿈꾸었던 우리나라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닌, 백성들이 행복한 나라

이 백성들에는 당연히 양반도, 중인도, 노비들도 행복한 나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꿈을 우리가 포기 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정조이산의 뜻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계속 살아 숨 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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