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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화를 이끌어간 동력, 선비


조선문화를 이끌어 갔던 저력, 선비 



서양에서는 ‘젠틀맨’이라고 하여 기본소양과 예의를 갖춘 사람들은 그리 부른다지요. 우리나라에는 그런 ‘젠틀맨’ 문화가 없는 가 했는데, 선비문화였습니다. 새삼, 선생님과 벗들과의 사귐에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참, 저의 시선은 이다지도 외부로 향하고 있었군요! 추사 선생님도 조선 선비 아니셨습니까, 선비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하하하, 알겠다. 조선 선비들이라...., 우선 나의 삶 속에서 그들은 살 맛이 나도록 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외려 외적인 조건을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더구나. 추사의 성격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모를게다. 그런 성격을 받아내고도 곁에 있어준 벗과 제자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나는 마음의 큰 빚이 있다. 추사를 둘러싼 벗과 학인들과의 사귐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보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견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것만으로는 한정 지을 수 없는 서로간의 예의를 지키면서 따뜻한 나눔을 실천했던 사회였단다.  


    

조선은 유학자의 나라였지.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대마다 그 시대를 규정하는 철학이나 종교가 있지 않았느냐, 조선은 유학의 이념으로 세워진 나라였지. 유학자들이 추구한 인간상은 군자 아니겠는가. 따라서 조선의 선비라면 관리가 되었건 지방에서 학문을 하였건 군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품고 이에 따라 몸과 정신을 갈고 닦고 학문을 추구하였지. 한 나라의 표준을 ‘군자적 인간’으로 세웠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자의든 타의든 ‘군자적 이상향’이 내세우는 규범에 따라 스스로를 가다듬고 지, 덕, 체를 실천하는 습관을 일상에서 길렀네.      



선비들은 한 번 지기를 맺으면 평생 친구간의 예와 의를 다하고 일상에서는 솔선수범하여 사람들을 이끌고 위기 시에는 가장 먼저 나서서 국난을 극복하고, 일상에서는 유연성 있게 대처하면서 향촌사회와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갔던 것이 조선의 선비였다. 이런 사회적 풍조가 오늘날까지 일부 살아남아 한국인들이 국제무대에서 모범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사람은 그저 그런 존재가 아니다.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너는 큰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그러니 너의 삶을 아름답게 완성하기 위해서 삶의 방향이 있어야 하고,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 자세를 선비들로부터 배우면 좋을 것 같구나.       



문,사,철을 기본으로 시,서,화를 교양으로 겸비했던 선비들은 서로 간의 만남 자체로 문화의 확장이 일어났지. 그런 사회풍조 속에 추사와 벗들도 존재했던 것이란다. 우리가 특별나서 아름다운 사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다만 유명했기에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일 뿐. 나와 벗들의 세계가 무궁무진 했던 것만큼 만남의 결과 문화사조가 탄생되고 조선사회에 문화적 흐름을 유행시킨 것은 맞다. 하지만 선비라면 서로 간의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만남을 가졌을 것이다.       



양반들의 놀이문화가 시, 서, 화 아니냐. 자연물을 보고 이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글이나 그림을 남기고 산천을 주유하며 풍수를 익히고 내가 살아가는 땅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가는 아름다운 문화를 가졌었지. 한 번 관계를 맺으면 벗은 또 다른 내가 되어 사정만 된다면 상대가족을 돌보거나 챙기면서 평생 동안 곁에 있었던 때로는 가족보다 더한 존재가 벗이었단다.      


사람이란 나 홀로 독야청정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내가 속한 시대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유배지에 있으면서 최신의 국제동향을 파악하고 익히고 꾸준히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은 모두 나의 벗과, 제자들, 가족들 덕분이었다. 그러니 추사가 남긴 유산은 추사 홀로 해낸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작품이라고 보았으면 하는구나. 다만 내가 대표해서 이름을 알렸을 뿐, 나를 도와주었던 벗들과 제자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얘기를 하자니 어쩔 수 없이 자랑처럼 들리네만 조선에는 이렇게 돈이나 이익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사귐을 만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네. 백탑파 학인들의 사귐이 그러했고 우리시대에까지도 유명세를 날렸던 오성과 한음 같은 선비들의 사귐을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조선 선비들이 아름다운 사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에는 선비정신이 우리문화 전반에 유유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네.      



조선이라는 나라를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을 것이네. 현대의 가치와 정확히 반대되는 위치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보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시 했던 나라였네.


물질적인 것을 배제하고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여 사물의 진리, 본질을 파악하고 나머지는 삿된 것이라 보는 풍조가 지배했었지. 사실은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몸을 입고 살아가는 이상 물질의 영향도 큰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게 배제하고 이념적으로만 흘렀던 것이 조선의 잘못이었지. 하지만 오늘날에는 물질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보다 우위에 있어 지나치게 그쪽으로만 흐르는 경향이 있어, 다시금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아지는구나.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조선은 학예일치는 추구하던 나라였다. 당시에는 선비문화라는 전통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었지. 품위가 격을 갖춘 인간이라면 인생의 목표를 군자에 가까운 선비가 되고자 하였지. 선비라면 가야할 길이 있었다. 문, 사, 철을 기본으로 시, 서, 화를 교양과목으로 겸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선비라면 응당 문무를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했다. 선비와의 사귐에서 빠질 수 없는 유흥은 시작詩作이었지. 시를 통해 상대의 학식과 인품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단다. 시를 통해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고 서로에게 그림이나 글자를 써서 선물하는 풍조, 멋있지 않느냐?      



조선 후기에는 청을 오가는 역관이나 무역을 했던 중인 세력들이 부를 이루면서 점차 양반들의 문화에도 접근, 시, 서, 화를 익히고자 한 사람들이 늘어났단다. 고작 시, 서, 화를 배우려고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내가 있던 제주까지 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시, 서, 화를 익히는 것이 단순히 취미 수준이 아니라 나의 완성에 일조하는 것이라면 인생을 걸고 할 만한 것 아니겠는가.      



‘추사’라는 사람의 유명세에 가려 다른 선비들의 활동이 덜 알려져서 그렇지 비단 추사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비라면 누구나 크던 작던 자신만의 세계를 가졌던 작은 군자이자 세상의 흐름에 시퍼렇게 살아있던 지식인이었다. 그런 인재들이 비단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 한 마을에 적어도 한 사람씩은 있었던 것을 보면 조선은 인문학의 나라이자, 다양한 사상이 꿈틀대던 나라였다.      



그런 이유로 대개 250년이면 한 나라의 ‘운’이 다한다고 하지 않느냐, 하지만 조선은 더 나아가 500년이나 지속되었던 나라였지. 난, 후손들이 조선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은 원치 않는다. 지금의 후손들이 우리보단 훨씬 깨어있고 낫다고 생각하니까, 다만 선비정신만은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선비정신의 전통은 조선에만 존재하던 것이 아닌, 우리나라 역사 시작부터 지금까지 저변에 흐르던 한국인 본래의 정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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