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이산 vs. 연산군: 트라우마는 어떻게 작용했는가
정조임금과 비슷한 경우지만 반대의 방향으로 가버렸던 왕이 있죠. 누구일까요?
연산군입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죠? 폭정 연산군으로 말입니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윤씨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왜 폭정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공부하면 또 연산군! 연산군! 이렇게 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정조이산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경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가슴에 남았죠.
진화의 동인 세 가지 중에 만남, 고통, 권태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승화할 수 있다면 진화의 길로 가는 것이고, 머물러있거나 도망친다면 퇴보의 길로 가는 것이지요. 사회가 발달할수록 보이는 싸움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역의 싸움이 치열해집니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창기에는 칼로 무력으로 상대방을 죽이면 끝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말싸움으로 혹은 심리전으로 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사람의 진가는 어려운 때 드러난다고 합니다. 만약 정조이산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려 했다면 세손시절에 죽음을 면치 못했거나 노론의 꼭두각시 왕으로만 존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트라우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면아이라고도 해야 할까요? 힘겨운 상황, 혹은 그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그 안에 머무르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 밖을 벗어나면 ‘트라우마’를 겪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올 것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마음을 닫게 되는 것이죠. 모든 동작 그만! 땡! 모든 것을 가진 천재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정조이산은 엄청난 트라우마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재위시절 내내 자신의 아버지를 반역으로 몰고 간 세력들을 마주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왕이었기에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죠. 중심을 잘 잡고 노련하게 정치를 해야 하죠.
같은 일을 겪어도 한 사람은 연산군의 길을 걸어가고 한 사람은 정조이산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차이가 뭘까? 타고난 자질의 차이도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정조절이 관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조이산이라고 왜 피의 복수극을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말년의 실록에 보면 그 잘생겼던 임금이 머리가 하얗게 새고 이가 빠져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에는 화기운으로 종기가 가득했다죠.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명했습니다. 피의 복수는 1차원적인 복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끝이 허무할 뿐이지요. 그래서 그는 세손시절부터 조선을 개혁하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꿈꾸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힘든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연산군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지탱해줄 이상도 없었고, 어린 시절 주변에 좋은 어른들도 없었지요.
정조이산의 선악과는 그러니까 사도세자의 이른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사도세자도 분명한 역할이 있었습니다. 문약한 조선에 무武를 불러 넣어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물질적 기반을 세우는 것이었죠. 사도세자가 만약 살았었다면 그 역할을 했을 텐데요,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정조이산은 어려움 속에 왕위에 즉위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11살 시절, 눈앞에서 목격했던 어린 이산은 평생 아버지의 죽음을 잊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악'의 방향으로 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이 진화하기 위한 동력으로 삼아 결국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수원화성을 건축하고 조선 마지막 르네상스를 일궈냅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250-300년을 분기로 하여 변화하는 양상을 띱니다. 지금이 정조 시대를 지난 새로운 분기점에 도달해있죠. 여러분의 선악과는 어쩌면 여러분을 키워줄 동력으로 가지고 온 것일 수 있습니다. 무지하게 어려운 공부이지만 극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연산군이 될 수도 정조이산이 될 수도 있게 만드는 공부입니다.
정조이산을 공부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저 위에 혼자 고고하게 떠 있는 위인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에게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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