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는 덥지만 때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여행하기에는 좋은 계절이었다. 오늘 그녀를 만난다고 하니 마음이 설렌다. 빈손으로 강릉을 방문할 수는 없어 근처 꽃집에서 백합 한 송이를 샀다. 그녀를 닮은 난초를 사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녀와 닮은 백합으로 대체. 꽃을 품 안에 안고 친구 삼아 드디어 강릉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은 텅 비다시피 하여 쾌적하게 갈 수 있었다. 버스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강원도로 가는 길의 자연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면서 알아 가는 즐거움이 있다. 남도로 내려가는 길은 평지가 많고, 숲의 색이 옅어서 푸근한 느낌을 준다고 하면 강원도로 가는 길은 산세가 험악하고 골짜기가 깊어 정신을 서늘하게 깨어 있게 해 준다. 산이 내게 ‘정신 차려라’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시간 정도 달린 끝에 강릉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렸다. 관광지인 덕에 터미널에서 내리면 바로 관광안내소가 있어 그곳에서 허난설헌 생가터, 김시습 기념관, 선교장 등 강릉 여행정보를 얻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허난설헌 생가로 향하는 버스는 많다. 200, 206, 222, 223번을 타고 가면 된다고 한다. 그중 가장 빨리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강릉 시내를 거쳐 강릉고등학교 앞에 내렸다. 내리고 바로 생가터가 보인다고 들었는데 강릉고등학교 앞에 보이는 거라곤 작은 마을과 소나무밭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무작정 앞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초당 두부집이 여럿 보인다. ‘이 방향이 맞나 보다’ 안심하고 걸어가니 이정표에 허난설헌 생가터 가는 길이라고 쓰여 있다.
생가터로 가는 길은 걸어서 5분 남짓 되는 짧은 길이었지만 깨끗하고 예쁘장하게 꾸며져 있어 그 거리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평소에 보는 골목길은 양 대로에 차가 늘어서 있고, 쓰레기 봉지들이 전봇대마다 한 뭉텅이씩 쌓여 있는 모습인데 생가터로 가는 골목길은 담벼락에 애기똥풀이며 붓꽃이 줄지어 서 있고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은 기둥을 타고 담장 밖에까지 튀어나와, 골목길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덕택에 나는 길을 걸으며 공간이 주는 소담스러운 느낌을 마음껏 만끽했다. 생가터로 들어가기 직전, 나무 위에 지은 작은 집 한 채가 눈길을 끈다. 사다리가 거꾸로 놓인 것을 보면 이제는 쓰지 않는 집 같지만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조그마한 집이었는데 번지수까지 달린 걸 보면 어엿한 독립된 한 채의 집인가 보다. 초록색 지붕, 초록색 페인트칠을 한 어렸을 때 보았던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초록집처럼 보였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저런 집 지어 놓고 ‘낮엔 일하고 밤에 글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드디어 허난설헌 생가터로 들어섰다. 허난설헌 생가터는 허난설헌·허균 기념공원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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