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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May 22. 2020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2019. 04. 13

그 불한당을 봤다. <불한당> - 얄팍한 놈들의 세상. 얄팍한 전사로부터 잉태되어 얄팍한 서사를 가지고 얄팍한 결말에 몸을 던지다가 수면이 너무 낮아 고꾸라져 죽어버린 우리 불한당들. 가엾지도 않군. 가엾다는 건 이입했다는 건데 빈틈들도 없고 파고들고 싶지도 않아서 사실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인생들이다.



이 얄팍함을 잘 더듬어서 보다 보면 이상하게 두꺼운 부분이 잡히는데 아마 "이 이야기의 교훈은, 사람을 믿지 마. 상황을 믿어야 해." 였나. '이 이야기'가 무어냐면, 주인공 한재호의 부모님이 가난한 살림에 한재호를 학대하다가 어느날 식사에 쥐약을 넣어 죽이려고 했단다. 그때 한재호는 사람이 아닌 상황을 보는 법을 알았다고 했다. 나는 아주 몸서리를 쳤다! 한밤중에 자리끼 들고 잠에 들으려다 문득 쳐다본 화면의 남자가, 그런 오만한 촌탁질을 해서. 사람이 상황만 보며 살다보면 돌고 만다. 돌아서 돌고래가 되면 좋을 텐데 사람은 돌았을 때 정신병자 외에는 아무 것도 될 게 없다. 정신병자가 된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다. 지랄의 방정식 같은 걸 증명하는 일 말고는 인생에 즐거울 게 없어진다.

어릴 때 그렇게 유감스러운 지능을 가졌던 것 같진 않은데(조금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ADHD와 틱장애가 심각했던 걸 제외하면)

괄호를 쓰고 나니 수정을 해야 할 것 같군. 아무튼간 주변에서 요구하는 것도 많고 기대하는 것도 많아서 차선책으로 똑똑해지기가 아니라 똑똑한 것처럼 보이기를 택했다. 아무 두꺼운 책이나 잡고 몇 시간 공들여 읽은 뒤에 상황에 어울리는 몇 개 구절을 떠올려서 그게 내가 창조한 생각인양 말했다. 어른들은 좋아하거나, 이 자식이 건방을 떠네 하거나, 넌 말이 너무 많아 그랬다. 친구도 별로 뭐 적었던 것 같은데 아주 한결같은 삶이로다. 가령 친구나 선생님이 뭔가 사회적인 이야기를 꺼내면 "아 그거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도 나와요." 한다. 그럼 백이면 백 막스 베버를 읽은 사람은 윤리 교사가 아닌 이상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 적중률이 8할이 넘었다. 점차 알고리즘도 생겨났다. 그런 책도 읽고 대단하네 > 성공. 뭔 소리야? > 평타. 아... 그래? > 실패. 이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고등학생 때도 써먹었다. 토론 대회를 준비하다가, 그냥 중얼거리고 싶어서 "아...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했다. 그랬더니 그리운 알고리즘이 나왔다. "뭔 소리야?"



입력만 반복하는 사람은 산출에만 집중하는 인간의 동경하는 대상이 된다. 산출인간은 입력인간의 무한한 습득력과 책을 펼칠 수 있는 체력, 정신력, 끈기 그리고 축적된 지식의 산을 부러워 한다. 입력인간은 산출인간의 결과물로부터 자기 깊이만큼의 해석을 시도하지만 금방 알아채고 만다. 이 자식 공갈이잖아. 날 때부터 냉소적일 수밖에 없는 입력인간들은 무한한 혐오와 조소를 느끼면서 산출인간들로부터 유리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또다른 입력인간에의 동경으로부터 말미암은 동질감을 가지고 한 가지 영역안에 소속되려 자기만의 방식을 찾는다. 이들의 구심점에 있는 입력인간이 입력-산출인간에 가까울수록, 그러니까 얻은 만큼 뱉기 때문에 입력인간의 심중으로 충분히 해석되는 테스트를 거쳐 통과하게 되면, 둘은 서로를 알아보고 더할 나위 없는 인력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단절된 산출인간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린다. "젠장...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평생 똑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단 한 순간도 스스로가 똑똑했던 것 같진 않다. 타인에게 얻은 평가의 90퍼센트가 똑똑하다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렇게 보이도록 의도한 결과이기에 감흥이 없다. 그건 내가 아직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시절 산출인간은 자주 꺄악대며 소리를 높이고 웃고 떠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뛰는 것도 좋아했다. 참 좋아하는 게 많았다. 소리내어 국어책을 읽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는가 모른다. 누구나 그렇겠지. 다만 스스로를 질책하자면 사람이 아닌 상황을 본 것, 그래서 정신병에 다다랐나 혹은 정신병에 다다른 뒤 상황을 보게 되었나. 똑똑해지길 원한 사람들? 똑똑해 보이려 든 나? 유감스러운 지능의 한계? 정신병? 누구 잘못? 어느 쪽이 선행되었는지는 한재호도 알 수 없겠지. 걔가 깡패의 삶이라고 소시민인 나와 뭐 어느 것 하나 다른가. 예뻐하는 사람 있고 예뻐해주는 사람 없고, 어줍잖게 사람 보는 척을 하다가 사람한테 살해당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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