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혓바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완 May 22. 2020

지랄의 방정식

2019. 03. 28

글을 쓰기 전 오래도록 고민했다. 최근 거덜난 인간관계에 깊은 영감을 받아 위 헤드라인으로 무언가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적당히 쌍으로 지랄난 콘텐츠가 의외로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례로 불륜질하고 자빠진 모씨 영화가 대표적이겠지만, 나의 심신을 위하여 감정의 동요가 격해질 만한 작품들은 되도록 피하는 편이기에 리뷰를 쓸 만큼 충분히 감상할 수는 없었다.

고전에서 찾아보면,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도 의외로 쌍방으로 지랄행진하는 내용이다. 잘생긴 부잣집 왜구 요조가 쉴 틈 없이 여자 꼬이는 인생을 고통스럽게 여기며 정작 곁을 맴돌던 호리키와는 잠자리를 가질 생각도 않는, 헤테로 스릴러 로맨스 장르다. 잠깐 이야기를 비껴나자면 경험상 지랄은 레즈비언들이 더 심하다. 이들은 여성에 동성애자라는 격동의 이중트랩에 갇혀 똑똑해지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생존환경을 스스로 조성했으며, (내가 그랬듯이) 한번 뿌려진 인연의 씨를 죽기살기로 살려내서 콩나무 쯤은 아니더라도 콩나물 정도는 끝장을 봐야 하는 불굴의 의지력을 갖추게 되었다. 레즈비언은 스파르타 인생을 산다. 그렇게 조기 은퇴로 벤치 신세를 지거나 난 야구 같은 건 하는 것보다 보는 게 좋다며 소극적으로 콘템플라티오를 주창하고는 관중석에 들어 앉아 눈물을 훔친다. 그런데 어제 한화팬과 기아팬 중 분명 어느쪽은 이기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둘 다 화가 나 있는 참으로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아무튼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지랄난 꼴들과 마주하게 되어 있다. 가령 맞짝사랑중인 A와 B 사이에 끼어 병살타를 기다린다든지. 둘이서 각자 상대와 함께하는 나를 견제한다든지. 난 전혀 너희를 방해할 생각이 없어 라고 어필하는데도 피곤하게 만든다든지 그렇다. 기대가 있으니 의심도 있는 거겠지만 기대하게 만들지도 않은 나는 왜 의심받아야 하는가? 결국 이렇게 일기가 되어버리고 마는 걸까? 어서 쌍으로 지랄난 콘텐츠를 찾아보자. 하지만 픽션은 현실을 이길 수가 없다. 참 대단한 현실을 매일 아침 마주하는 나로서는 어느 작품에서 만들어진 환장을 느끼든 문장 구성이 조악한 소설을 보는 기분이다.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을 좋아했다. <티티새>와 <N.P>. 사실상 요시모토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 어린 나이에 소설이란 걸 써보고자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그가 나의 파멸에 일조한 셈이다.

두 소설에서는 비슷하게 지랄난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관찰자 시점의 화자에 의해 묘사되고 해석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작품의 문제이자 해답의 역할을 수행한다. <티티새> 주인공 츠구미는 사탄 같은 인성에 미륵 같은 외모를 가져서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존재다. 너무나 병약한 나머지 히스테리컬한 개지랄로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떤 지랄도 받아줄 만큼 가여운 일인가보다. <N.P> 주인공 스이는 어디 아프지는 않지만 천성적으로 지랄이 났다. 츠구미보다 안쓰러운 셈이다. 해명되지 못하는 지랄이니까, 약을 먹든가 안정병동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약은 지랄을 치유해주지만 안정병동은 그렇지 못하다. 입원 경험이 없는 내가 주변에서 수집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면, 안정병동은 치유가 아닌 망각을 안겨주는 것 같다. 정확히는 정신승리를 통한 망각이다. 새벽에 센티멘탈한 거리를 내려다 보며 사색에 잠기기 일쑤인 울병자(방금 만든 말)들을 삼시세끼 식사시키고 개인전화를 압수하고 저녁 아홉시 반이면 소등해서 재웠다가 다음날 오전 여섯 시부터 가벼운 신체활동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게 만드니 대부분은 어 나 사실 우울증 아니었나봐 하고 성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는 종결이 아닌 지속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활습관을 완전히 갖추고 퇴원하지 않는 이상 다시 입원실에 이름을 올릴 확률이 높다.

거두절미하면 츠구미는 가족 동의로 안전병동에 갔다가 병동이 견디지 못한 강력한 지랄포로 작중과 같이 창문을 깨고 탈출할 인간상이다. 스이는 장난기가 많을 뿐 적어도 츠구미보다는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atm 앞에 선 사람 등허리에 손가락 대고 총인 척 하기, 비오는 날 물 채운 페트병으로 뒷무릎 후려패고 자기가 울기, 남의 유고 위조하기 etc) 완치된 척 퇴원했다가 다시 지랄을 부릴 유형이다. 어쩌다 이 두 주인공들의 지랄값을 책정하는 에세이로 변모해버렸는가 모르겠다. 내가 입증하고 싶었던 건, 쌍으로 발생하는 지랄이란 1차함수 y=x +n 그래프 형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y값이 커질수록 x값도 커진다. 미치광이 y값이 마이너스 또라이에 불과했던 x값을 광기로 물들여서 비례적인 또라이가 되도록 한다. 나는 이 방정식을 <지랄의 방정식>으로 명명한다. 어쨌건 해당되는 지랄 반려자들 중 뒤늦게 광기에 눈을 뜬 x값이 죄없는 z값을 술자리로 불러내어 답없는 성생활 tmi를 강제로 대입시킨다. 자기만의 평화로운 방정식을 약탈당한 슬픈 z값은 술에 꼴은 x값이 16살 차이 나는 y값에게 전화를 걸어 아양 떠는 걸 택시 태워 보내고 블로그를 개설해 지랄듀오에 관한 단상이나 쓰고 마는 것이다.

여전히 병살타를 기다리는 z값은 그토록 공들여 사색한 글이 엉망이 되어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앞으로 지을 표정보다 더 확실한 건 인생이 얼마나 남았든간에 변함 없이 스파르타일 것이며 사람이란 웃어서 행복한 걸까 행복해서 웃는 걸까 삼 년이 흐른 여태껏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음 번에는 <지랄의 이차방정식>도 서술할 생각이다. 우리네 세상에 지랄난 인간이란 마르지 않는 샘, 멈추지 않는 화수분! 무한동력.

매거진의 이전글 이 가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