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장사꾼의 글쓰기
생각과 실행이란 이렇게 멀고 먼 것이다. 아직 이삿날도 정해지지 않았건만, 집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선별 정리해야 할 대상으로 느껴지면서 더 이상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할 테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할 테고...... 이런 생각의 가짓수가 늘어나다 보면 한계치에 다다라 생각만으로도 벌써 지쳐있는 나였다. 그러다가 다음 세입자를 구해야 하는 상황을 집주인과 부동산에 알리고, 포털 부동산 매물 리스트에 우리 집이 떡하니 올라와 있음을 확인하고 나니, 당장 집을 보러 오겠다고 연락이 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현실 자각이 몰려왔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즉각 실행하는 사람이 아닌, '이젠 정말 해야겠구나' 하는 상황이 오면 시작하는 사람. 어차피 정리해야 할 짐들이라면 얼른 정리하고 비워서, 집 보러 오는 미래의 예비 입주자에게 여백의 미 가득한 집을 보여주는 게 좋겠지. 시기적절하게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는다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우선 가져갈 큰 가구는 제쳐두고, 작은 소가구들을 처분하기로 했다. 국내 이사였다면 당연히 다 가지고 움직일 것들이지만, 컨테이너가 어느 만큼 의 짐을 허락할지 가늠할 수 없기에 우선은 짐을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한다. 필수가 아니라 소소한 편리함으로 사용했던 작은 가구들을 하나씩 꺼내서 내용물을 선별한다. 가지고 가야 할 것들과 버릴 것들.
생각보다 버릴 것들이 많다는 사실에, 진즉에 정리하지 않고 끌어안고 살고 있던 나는 게으른 건가, 아니면 저장 강박인 건가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고 있었기에 선별이라는 작업 자체도 개인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요즘은 많이 사장된 폐백을 내가 결혼했던 17년 전 당시에는 당연스레 여겼다. 폐백 상차림 위에 놓였던 목각 원앙 한쌍을 지금껏 가지고 있는데, 이 원앙 커플은 행복하게 잘 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물건이라 버리면 왠지 우리 부부의 사이를 갈라놓을 것만 같은 미신을 떠올리며 찜찜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물건이 집 안에 있는 줄은 아마도 나밖에 모를, 심지어 나마저도 이사할 때만 발견하고 처분 여부를 고민하는 이 커플을 바다 건너는 컨테이너에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식이었으니, 과감하게 버리고 정리하자고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심해지는 나를 계속 마주하게 되는 것이었다.
소심한 나를 자꾸 구슬려 과감해질 것을 강요해야 하는 상황에 왠지 죄책감이 들었다. 우린 정말 너무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비 권하는 사회, 소비가 미덕인 사회, 절약은 왠지 부끄러운 사회, 아까운 줄 모르는 사회. 처분해야 할 물건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우리 집은 나를 왠지 부끄럽게 했다. 자연스레 당근마켓으로 이어지는 나. 깨끗하게 손질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보냄으로써 이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근거래가 처음인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이었기에 조심스레 하나씩 물건을 올렸다. 정리하다가 아까운 물건이 나오면 5천 원, 1만 원 하는 식이었는데, '버리기엔 아깝지만 남 주기엔 미안한' 물건은 무료 나눔으로 올렸다. 그렇게 하루이틀 사이에 열 건 이상의 거래를 성사시키고 보니, 거래 약속 시간과 물건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금 바로 오겠다는 사람, 주말에 가지러 오겠다는 사람, 비대면으로 가져가겠다는 사람...... 메모장을 열어 적어 둘 수밖에.
- 오늘 7시 만화책 세트 1만
- 내일 아침 9시 수납함 비대면 내놓기
- 내일 11시 현관 발판 1만
- 내일 1시 트롤리 비대면 내놓기
- 내일 3시 인라인 보호대 나눔.
장사꾼이 따로 없었다. 하루를 거래 약속으로 빼곡히 채워놓고, 정리하는 틈틈이 약속 시간이 되면 물건 배달하러 나갔다 오는 당근 장사꾼. 나에게 아까운 물건을 흔쾌히 가져가는 사람이 고마웠고,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가서 그 쓰임을 다 하는 물건들이 뿌듯했다. 파는 사람도 좋고, 사는 사람도 좋고, 당근마켓을 만든 사람은 정말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천재가 아닐까. 만 원, 5천 원이 쌓여 5만 원이 넘어가자 나는 신이 나서 외쳤다.
"얘들아, 당근 해서 우리 치킨 사 먹자!"
나의 매너 온도는 당근마켓에 가입한 이후 늘 변동이 없었는데, 어느새 내 체온은 40도, 뜨끈뜨끈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때그때 느끼는 감회가 몇 겹으로 늘어나면서, 지금 나의 상황과 감정을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당근대작전>이라는 단어가 슬그머니 떠올랐다.
그래, '글쓰기는 습관이다, 글쓰기는 매일 해야 한다'는 남들의 그럴듯한 말을 접했을 때, 그렇지 못한 내가 한없이 작아지던 느낌은 항상 나 스스로를 비난하는 나쁜 습관 때문이었을 거야. 나는 일상에서 글감을 발견했을 때, 몰입해서 쓰는 걸 즐기는 사람이니까. 그래, 나는 나의 스타일을 이해하고 내 스타일 대로 가면 되는 거지.
그렇게 <당근대작전>을 시작한다.
이 작전의 전략은 단순하다.
1. 바다를 건너갈 짐들을 선별, 정리한다.
2. 시간 약속을 잡고 당근장사꾼 배달을 나갔다 온다.
3. 정리하면서, 물건을 건네고 들어오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쏟아내러 브런치 앞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