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덕에 인생 공부
당근! 당근!
하루에도 몇 번씩 알림이 울린다. 일주일 간 판매 완료 건이 20개가 넘고, 문의를 해오는 사람 수는 그 곱절이 넘었다. 인기 있는 물건이었던지 올리자마자 10명 이상 문의해 오는 경우도 있었고, 아무도 관심 없는 물건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손하게 인사부터 하는 사람도 있고, '제가 살게요!' 번쩍 손부터 드는 사람도 있었다. 아주 짧게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지만, 그 면면들이 나에게 남기는 인상들이 쌓여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 하나를 만들어줬다고 할까. 비대면으로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들까지도 챗으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인상을 나에게 남겼으니 말이다.
당근에서 만난 사람들 1
구피를 키우던 옹기 수반이었다. 2시 반 약속을 잡았는데, 2시에 메시지가 왔다.
'5분 후 도착합니다'
'일찍 오셨네요. 나갈게요.'
아파트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2시 20분이 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앞선 시간의 다른 당근거래와 헷갈려서 메시지를 잘못 보냈단다. 황당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오고 있는 중이라길래 그냥 계속 기다리기로 했다.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기라도 하듯 구매자는 40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아직은 쌀쌀했던 날씨에 30분을 넘게 밖에 서있던 내 얼굴은 분명 썩어있었을 것이었다. 늦게 도착한 구매자는 60대로 보이는 어르신이었는데, 미안함에 후다닥 내려서 물건을 받아 들고는 해명을 하느라 어쩔 줄 몰라하셨다.
"어우~ 30분을 넘게 기다렸어요."
"아이고... 정말 미안합니다. 그게, 우리 아들이 카페를 운영하는데 잔디밭에서 아이들 가지고 놀라고 커다란 장난감 트럭을 나눔 받아 오느라고... 어항도 카페에다 놓으려고 하거든요."
나에게 굳이, 아들이 운영하는 카페에 필요한 장난감을 구구절절 얘기하실 필요는 없는데...... 미안함과 난감함, 허둥지둥, 수다스러운 어르신의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그만 불퉁했던 마음을 풀어버렸다.
'그럼 혹시 물고기도 필요하세요? 물고기도 드릴까요?'
집에는 아직 유리 어항에 구피 30마리가 살고 있었으니, 생명체를 바다건너까지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라 헤어질 결심은 이미 했고, 헤어질 방법을 고민 중이었다. 흔쾌히 좋다고 말씀하신 어르신은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물고기까지 쳐서 약속했던 가격 1만 원에 1만 원을 더 얹어 현금 2만 원을 주시고는 아들이 운영하는 카페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으셨다. 카페가 어딘데요? 그러시구나... 한 번 놀러 갈게요. 5분이 넘고 10분이 넘도록 이어지는 이야기를 끊을 수 없어 듣고 있자니, 카페를 홍보하고 싶은 마음, 아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 풀어놓고 싶어 하는 우리네 부모님들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아까 나와서 기다리기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1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를 얼른 비집고 들어가 '이제 얼른 가셔야죠.' 했더니,
"물고기는요?"
"아, 지금 바로는 어려워요. 물고기 잡아 담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려요. 조만간 물고기 가지고 카페로 놀러 갈게요."
물고기를 받아가려고 수다스러워지셨던 모양이다. 일주일 후 주말에 딸들과 구피를 담아 들고 이름을 받아두었던 카페에 찾아갔다. 아들로 보이는 젊은 사장님은 아버지께 전해 들었다며, 주문한 음료 쟁반에 서비스로 조각케이크 하나를 함께 내어주었다. 어항과 함께 물고기를 잘 보내고 난 편안함이 몰려왔는데, 예비 중학생이었던 둘째의 한 마디,
"구피 주고 케이크를 받았네. 흑..."
구피와 헤어짐을 아쉬워하던 녀석이다. 구피가 가고 케이크가 왔다. 케이크는 배속으로 사라졌지만, 나에겐 에피소드가 남았다.
당근에서 만난 사람들 2
이번에도 어항 용품, 어항 물갈이 용도의 수동 사이펀이었다. 마찬가지로 아파트 정문으로 나갔더니, 저쪽 편 길가에 세워진 차에서 빵! 경적을 울린다. 기웃기웃 이 사람이 구매자인가 싶어 다가가니, 운전석에 앉은 상태에서 조수석 창문을 내린다.
"당근이세요?"
"네, 이리 주세요. 계좌 번호는요?"
50대로 보이는 아저씨, 예의는 밥 말아 드셨나 보다. 주차가 어려운 번잡한 대로변도 아닌데, 내릴 생각도 없이 운전석에 앉은 상태로 손을 내민다. 조수석 창문으로 내 손을 넣어 물건을 넣어주고 창문 옆에 서서 계좌 이체를 기다리고 있자니, 잠깐이지만 이 모양새가 묘하게 기분 나쁘다. 이체된 금액을 확인하고 '잘 쓰세요.' 인사하고 보도로 올라서면서 뒤돌아보니 차는 벌써 출발해서 뒤꽁무니만 보였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중고로 넘긴 사이펀이 괜스레 아깝게 느껴진다는 사실.
사람의 면면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성격과 행동거지, 배려심과 이기심, 상대방을 바라보는 관점 등등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다양하게 만드는 걸까. 잠깐 스쳐가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이런 다양함을 바라보면서 의도치 않게 사람공부, 인생공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다양하고 다양해질수록 내가 조금씩 더 관대해지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가깝게 교류하는 가족이나 지인과는 서로에게 들이는 노력만큼 나에게도 그만큼의 노력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라 주관적인 감정이 너무 크게 작용한다. 그런데 거래를 위해 스쳐가듯 만나는 사람에게는 내가 들이는 노력도, 기대하는 노력도 없어서일까, 다양한 캐릭터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세상에는 저런 사람도 있구나.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하는구나. 저들도 나를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존재로 인식하겠지. 그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다양한 개인이 욕구와 만족을 좇으며 사는 게 이 세상인데, 나 역시 바글바글 개미처럼 이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존재일 뿐 누구를 욕하고 비난할 자격은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당근을 통해 세상 공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