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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도파민이라면 중독되어도 좋다

당근 도파민을 아시나요.

by 김글인

중고 거래로 매긴 가격이 너무 저렴했던 건지, 아니면 희소성이 있는 물건이었는지는 몰라도, 업로드하자마자 문의가 쇄도하는 경우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짜릿함도 있다. 초보 당근러였던 나는 무조건 첫 번째 문의자에게 거래 여부를 의논했고, 연락이 늦어지더라도 구매의사가 확실히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음 순번으로 넘겼다. 그러나 '안녕하세요' 후에 하루 종일 연락두절인 경우, 물건 상태와 사이즈 등을 한참 물어놓고 내일 결정하겠다는 경우 등을 겪은 후로는 점점 대범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이 몇 번째인지 알 수가 없고, 나는 그들의 느긋함을 기다릴 수 없으니, 더 근처에서 오는 사람, 첫 메시지에 더 적극성을 담는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주게 되었다. 아, 정말 경험이란 것은 사람을 노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5년 전 배웠던 캘리그래피 재료들을 몽땅 만 원에 내놓았다. 서예 연습을 위한 먹과 붓, 깔개, 문진과 물감 팔레트, 붓펜과 물을 담아 쓰는 워터브러시까지, 살 때의 가격을 생각하면 아주 저렴한 가격이긴 했지만, 5년이나 집에서 잠자고 있던 물건들이라 그야말로 가져가주기만 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게시글을 올리자마자 울리는 6번의 당근 알림에 나는 깜짝 놀랐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생각은 역시나, '2만 원에 올릴걸'.


이제 노련해진 나는 첫 번째 문의에 바로 답하기보다는 느긋하게 마음먹었다. 세 번째로 울린 메시지창이(그래봐야 3초 차일까), 시선을 끌었다.


"안녕하세요. OO동에 있는 아동센터입니다. 서예시간에 캘리그래피도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아이들한테 먼저 주고 싶네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32명이 사용하려고 합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동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 유용하게 쓰면 내가 더 기쁠 것 같았다. 순간 스쳐간 생각. 처분을 고민하던 초등 저학년용 10칸 공책, 알림장, 받아쓰기 노트 등 새 공책들과 훨씬 전부터 샤프를 쓰는 딸들이 내팽개쳐둔 새 연필 두 다스를 얼른 펼쳐놓고 사진을 찍었다.


"저희는 이제 다 중학생이 되어서 안 쓰는 물건들 정리 중인데요. 새 학용품들이 많은데 이것도 가져가시면 아이들이 잘 쓰게 되실까요?"



거래를 위해 만난 구매자는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만 원 한 장을 주시면서 묵직한 에코백 두 개를 받아 드시고는,


"센터에 서예 배우는 시간이 있는데 서예는 좀 심심한 면이 있어서 캘리그래피를 하면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재료가 꽤 비싸더라고요."

"네. 색깔 칠하기도 같이 하게 되니까 아이들이 훨씬 좋아할 거예요."

"이렇게 많이 주시다니요.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따뜻함을 무한정 나누어주실 것 같은 푸근한 인상이셨다. 만 원 한 장도 왠지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그것도 좋지만은 않을 듯해서 고이 접어두었다. 내 물건들로 즐거운 시간 보낼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 어떤 거래보다 흐뭇하고 기쁜 마음이었다.


아동 센터에서 너의 쓸모를 다하거라.


좋은 일을 하면 이렇게 흐뭇한 것을. 당근 관계자 중에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제안을 한번 해볼까 보다. 당근의 기능 중 하나로 기부처를 만들어놓으면 어떨까. 내 근처 동네에 있는 기부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물건을 올릴 때 '기부처에 제안하기'와 같은 체크박스 옵션을 추가하는 것이다. 또는 자격요건을 갖춘 사회적 기관의 당근 구매자에게 부여하는 배지 같은 기능을 추가하면 어떨까. 구매를 원하는 사람 중에 기부처 배지를 달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권을 줄 수 있도록 표식을 달아주는 것이다. 물건을 기부하는 방법을 떠올려 본 적도 있지만, 어디에 어떻게 기부해야 할지, 기관에서 꺼려하는 물건의 기준이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기부'라는 단어가 멀게만 느껴졌던 사실을 떠올려본다. 당근이 전국적으로 친근한 중고 물품 거래 장터로 활성화된 만큼 사회적 기능을 추가하면 좋을 듯하다. 소비가 만연할수록 버려지는 물건도 많고, 그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도 더 심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근마켓의 취지에도 딱 들어맞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던가 의아스러워졌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은 당근을 경험한 나의 변화, 당근이 나에게 경험하게 해 준 도파민이다. 당근 도파민.


이런 도파민이라면 중독되어도 좋겠다.

널리널리 퍼져라, 당근 도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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